[단독-줄줄 샌 국책연구비]수억원 ‘먹튀’도 제재기간 끝나면 ‘없던 일’

입력 2014-10-13 03:05
사례1 서울 소재 사립대 A교수는 2011년 세계수준 연구중심대학(WCU) 사업에 선정돼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6억원을 지원받았다. 연구 주제는 국가 간 평화 유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국책 연구과제를 관리하는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연구결과불량' 판정을 받았고, 1억원을 반납했다. A교수에게는 국가 연구개발 참여제한 조치가 내려졌지만 제재기간은 1년으로 지난해 4월 제재가 풀렸다.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연구비 5억원은 회수되지 않았다. 제재가 만료된 A교수는 아무런 장애 없이 다시 국책 연구개발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회복했다.

사례2 지방 국립대 소속 B교수는 2009년 일반연구자 지원사업에 선정돼 사람 얼굴과 관련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역시 정부로부터 연구비 1억원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해당 연구는 '연구결과불량' 판정을 받았다. B교수도 2011년 10월부터 참여제한 제재를 받았으나 제재는 1년 만인 2012년 10월 만료됐다. B교수가 사용한 예산은 한 푼도 국가에 반납되지 않았다. 1년 동안 정부가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했을 뿐이다.

국가 연구개발 참여제한자 현황’에 등장하는 사례들이다. 자료에는 국가 예산이 지원된 연구 프로젝트에서 연구비가 줄줄 새고 있는 사례가 나열돼 있다. 정부는 이런 불량 연구자들에게 국책 연구과제 참여를 제한하는 제재 조치를 내리지만 ‘솜방망이’ 처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제재 실효성 의문=A교수와 B교수는 적지 않은 국가 예산을 허비했지만 특별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제재 기간이 종료되면 또 다른 국책연구 프로젝트나 BK21(두뇌한국) 플러스와 같은 대형 연구지원 사업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더구나 제재 기간 중이라도 정부의 각종 교육지원 사업에는 참여할 수 있다. 대학 특성화 사업(CK), 학부교육선도대학 사업(ACE), 산학협력 선도대학 사업(LINK) 등은 연구자가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있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 학문을 연구하는 연구·개발 사업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지원 사업은 성격이 다르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제재 기간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정부 예산을 받았지만 연구 결과물을 제출하지 않고 제재가 만료된 ‘먹튀’ 교수 111명은 1∼3년 동안 국책연구 프로젝트에서 배제될 뿐이다. 그나마 실제 평균 제재기간은 2년4개월에 불과했다. 먹튀 교수들이 106억원을 연구비로 받아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제재 기간 중 교수 1명이 매달 340만원을 받아간 셈이다. 특히 교수들의 경우 안식년 제도나 해외연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제재 기간을 효율적으로 피할 수도 있다.

◇허술한 불량연구 관리=불량 연구자로 등재되는 과정도 허술하다. 연구 프로젝트별로 차이는 있으나 통상 계약 당사자인 정부와 약속한 연구 마감 시한을 2년 넘겨도 불량 연구자로 등재하지 않는다. 2년이 지나 제재 기간이 시작되더라도 언제든 연구물만 제출하면 즉시 제재가 해제된다. 느슨한 규정 때문에 자신이 제재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사실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비도덕적인 연구로 물의를 일으킨 경우에도 처분은 관대했다. 연구개발비를 정해진 용도 외에 썼다가 적발된 인원은 53명이다. 이들에게 지원된 예산은 275억5933만원이었는데, ‘용도 외 사용’이 확인돼 회수된 금액은 8억7309만원이었다. 하지만 적발된 금액을 회수하는 것 외에 다른 제재는 없었다. ‘전체 연구 프로젝트에는 문제없다’는 논리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연구개발비 유용이 적발되면 반납하면 되고, 적발되지 않으면 그만인 셈이다. 부정한 연구방법으로 과제를 수행하다 적발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3건이 적발됐지만 지원 예산 7억6000만원 중 3억5621만원만 회수됐을 뿐이다.

◇서울·연세·고려대 순으로 불량 연구자 많아=불량 연구자로 등재돼 현재 재재가 진행 중인 인원은 서울대가 49명으로 가장 많았다. 연구 프로젝트 건수도 44건으로 최다였다. 연세대가 33명이고 건수는 35건으로 집계됐다. 다음으로 고려대가 26명이 제재를 받고 있으며 이들이 수행해 불량판정을 받은 연구과제는 30건이었다.

금액 기준으로는 이화여대가 193억7527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한양대가 73억3604만원으로 뒤를 이었다. 연세대가 41억1370만원, 서울대 30억21만원, 중앙대 18억5533만원 순이었다. 이화여대는 180억원짜리 연구 프로젝트 1개가 금액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 연구 프로젝트는 ‘그 외 법령 및 협약 위반’으로 분류돼 회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한양대 역시 69억원짜리 연구 프로젝트 1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12일 “도덕적해이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연구자들이 초심을 유지하기 어렵다”며 “연구비가 엉뚱하게 쓰이는 만큼 건전한 연구자들이 써야 할 돈이 줄어들기 때문에 국가 연구역량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도경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