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대준 (6) 3사관학교 시절 영·육 단련 ‘靑 경호실’서 빛나

입력 2014-10-13 02:56
3사관학교 시절 유도 대표선수로 활약한 주대준 KAIST 교수(가운데).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진로를 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많이 기도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내 생각과 마음을 송두리째 지배하며 강하게 임재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수표가 어디에 있는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앞길을 내가 계획했고, 세상적 야심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내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강권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부터 네 인생의 드라이브(운전대)를 나에게 맡겨라. 내가 친히 운행해 줄 테니 믿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다.

1974년 7월 경북 영천에 있는 3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막상 훈련을 받다 보니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정도였다. 특히 고등학교 2년 후배들과 함께 3사관학교 동기생으로 생도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3사관학교에서 2년간의 생도교육은 국가관과 충성심, 사명감 등 나의 인격 형성의 틀을 갖추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군 장교 생활을 거쳐 대통령 경호실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3사관학교 교육이 튼튼한 기초가 된 덕이다. 힘든 생도생활 중에도 예배와 QT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생활은 큰 버팀목이었다.

나는 고교 시절 매일 새벽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군화를 신고 4∼5㎞를 구보로 대구시청 뒤에 있는 무덕관에 갔다. 그곳에서 유도를 수련했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공인 3단을 받았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힘든 고학 시절에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구보와 유도 훈련을 잊지 않았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 야간부 학생들은 대부분 복싱 챔피언, 태권도 선수 등 유단자였다. 이들 사이에서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단련한 체력은 3사관학교 훈련 중에 더욱 빛을 발했다. 100명이 넘는 중대원 사이에서 선착순 달리기를 할 때마다 항상 1등이었다. 1000명 이상의 동기생 중에 유도선수로 발탁돼 탁월한 기량과 체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꾸준한 체력단련은 훗날 경호실에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임관을 앞두고 마지막 훈련인 유격을 하기 직전, 무리한 운동으로 관절 근육이 파열됐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통증이 심했다. 군의관은 유격불가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유격을 강행하기로 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유격을 받지 못하고 유급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무사히 유격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10㎏ 완전군장을 메고 연병장에 모여 출발하기 직전까지 간절히 기도했다. 놀랍게도 2주간 이어진 유격훈련을 하며 관절이 아프다는 것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유격 해제 신고를 위해 연병장에 다시 섰을 때야 2주 전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생각날 정도였다. 얼른 관절을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어디가 아팠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절이 말끔히 치유됐다. 그후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관절에 전혀 문제가 없다.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3사관학교의 교육은 나를 영적·육체적으로 강하게 단련시켰다. 또 지적으로도 다양하게 충전할 수 있었던, 내 삶에서 가장 유익한 기간이었다. 3사관학교 교육 중에 습득한 충성심과 사명감이 훗날 대통령경호실 5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을 창출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충성의 열매를 맺게 하는 엔진은 사명감이다. 사명이 있어야 충성할 수 있다. 즉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믿어야만 충성심을 발휘할 수 있다. 나는 3사관학교 교육 중에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 곧 내가 반드시 해야 할 나의 사명을 위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