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대준 (5) 주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노력 만큼 주신다

입력 2014-10-10 02:12
대구 용연사에서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의 주대준 KAIST 교수(왼쪽 세 번째). 용연사에서 함께 공부하던 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나는 갈림길에 섰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 중 몇몇은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동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대구 Y대 야간부에 다닐 준비를 했는데, 내게도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구미 전자공단 건설현장에서 막노동하며 만난 노동자들의 모습이 가슴에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사기당한 사람,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았다는 원망과 불만을 품고 인생의 밑바닥을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판검사가 되는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도 판검사를 꿈꾸며 공부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는 사법고시 합격을 그야말로 신분상승의 지름길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다’ ‘왜 내가 못해’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나는 대구와 가까운 달성군 옥포면 비슬산 기슭의 ‘용연사’라는 사찰에 들어갔다. 사찰에서 살며 공부하는 비용은 대구시내 하숙집들보다 30% 정도 저렴했다. 하지만 생활비를 따로 내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1년 동안 공부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인 스폰서의 지원을 받았다. 고아원에서 살 때 미국 일리노이주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를 후원했다. 고아원에서 나온 이후에도 그분에게 영어로 편지를 쓰며 교류를 했고, 내가 판검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사찰에서 고시공부를 시작하며 머리를 밀고 심지어 눈썹까지 밀며 최선을 다했다. 주일에는 사찰 아래 마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매일 아침 QT를 했다. 그런데 군 입대 영장이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나온 게 문제였다. 공부에도 집중이 잘 안 되고 딴생각에 빠지곤 했다. 결국 사찰에서의 고시공부는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비록 사법고시 합격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 기간은 인생을 사는 데 소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당시 사찰에는 나 말고도 여러 고시생들이 있었다. 나이도 출신도 제각각인 고시생들은 때로는 사찰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일을 저질렀다. 예를 들어 밤샘 공부를 하다가 고시생들끼리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는 등의 일이었다. 고시생들은 몰래 했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들은 훤히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참견하지 않았을 뿐이다. 스님들은 수도승처럼 엄격하게 계율을 지키면서 고시생들의 고뇌와 갈급한 마음을 인정해 주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처럼 스님들의 포용하는 마음과 상대를 인정하는 열린 자세는 인생을 사는 데 큰 교훈이 됐다.

군대와 청와대, 그리고 KAIST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많은 갈등을 겪었다. 때로는 내 의견과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직위가 올라가면서 나와 성격이 맞지 않거나 개성이 강한 직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젊은 시절 스님들에게 배운 교훈이 떠올랐다. 상대방의 의사를 먼저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하며 나와 다름, 즉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군 입대 영장을 받고 고민할 때 현역 장군이었던 친척 아저씨가 마침 3사관학교 생도 모집이 있다며 입학을 권유했다. 3사관학교에 가면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서는 건데 ‘과연 내 인생의 진로를 군에 맡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생겼다. 친척 아저씨는 3사관학교에서 일정 기간 교육받고 장교가 되면 대학공부도 할 수 있다며 3사관학교 입학을 강력히 권했다. 아저씨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기가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다’고 나를 설득했다.

내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결단을 해야 할 때였다.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전에 과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먼저 기도의 단을 쌓았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