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는 야고보서의 말씀은 가르치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경고다. 요즘처럼 교사를 구하기 어려운 때에 이런 구절을 섣불리 인용하기는 쉽지 않다. 용기를 갖고 인용했다가는 그나마 남아 있는 교사들의 가르치고자 하는 동기를 꺾어버리는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고보 기자는 단호하다. 가르치기는 좋아하고 자기는 가르친 대로 살기를 게을리하는 선생들에게 가차 없이 “선생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라”고 일침을 가한다. 당시 헬라문화권에서는 남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이들을 존경하고 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풍조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저마다 교사가 되려는 조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언행일치에는 게을리하면서 선생의 위치만 탐하는 이들에게 이토록 따끔한 경고가 필요했던 것이다. 과연 이러한 말씀이 오늘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유명한 신학자 슐라이어마허(1768∼1834)의 이야기다. 그는 한때 신학계를 주름잡은 거장이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슐라이어마허의 신간서적을 구입해 대학자 앞에 놓았다. “선생님, 서명을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다. 대학자는 자신의 책 안쪽 면에 서명을 멋지게 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도 너무 기뻐했다. 그런데 그 대학자가 자신의 서명 밑에 ‘신학도’라고 쓰는 게 아닌가. 당황한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당신께서 학생이라고 하시면 저같이 선생님에게 배우는 사람은 과연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그때 그가 한 말이 명언이다. “저도 역시 진리를 겸허히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 진리 앞에선 누구나 ‘학습자’다. 남의 앞에 서서 가르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과연 무엇이기에 남을 지도한다는 말인가. 우리 중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많은 학생들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나 슐라이어마허처럼 학습자의 자세를 배운다면 부끄러움 없이 교사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학습자다. 교사는 가르치는 학습자, 즉 교사 학습자(teacher-learner)다. 학생은 배우는 학습자. 즉 학생 학습자(student-learner)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배우는 사람들이다. 교사라고 해서 학생들 앞에서 폼을 잡아서는 안 된다. 학생이라고 해서 교사 앞에서 주눅들 것도 없다. 다만 진리 앞에서 상호간 겸손한 마음 자세를 갖고 서 있을 뿐이다.
“열 가구가 있는 작은 마을에도 공자같이 충실하고 믿을 만한 사람은 있지만 공자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선각자 김교신은 그의 책 ‘조와’에서 “공자의 해면 조직같이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그 마음이 한없이 그리워진다”고 말했다. 교사가 학습자의 자세를 버리게 되는 이유를 교만이라고 본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멧돼지 쓸개를 먹은 후에는 다른 약효가 나지 못하거니와, 신앙적 경화병이 걸린 후에는 백약이 무효하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도 한없이 부드럽고 겸허한 마음을 가진 배우고 또 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학습자의 자세를 정확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 모두 해면 조직같이 부드럽고 융통성 있는 한없이 부드럽고 겸허한 학습자가 되자. 죽을 때까지 배우는 사람이 되자. 이 정신이 우리를 진정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참스승이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제자로 만들어 준다.
김도일 교수(장신대 기독교교육과)
[시온의 소리-김도일] 죽을 때까지 배우는 사람
입력 2014-10-10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