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500년 역사 한글, 500년 후에도 살아남을까?

입력 2014-10-10 02:49
조선시대 명필가들도 한글편지(언간)를 남겼다. 서예연구가 박병천씨는 최근 출간한 ‘한글서체학연구’(사회평론)에서 우암 송시열(오른쪽)과 추사 김정희의 언간체를 비교했다. 그는 “우암체는 조금 흘려 썼고, 추사체는 더 흘려 썼으며 서체에서 풍기는 맛은 우암체는 키를 작게, 추사체는 키를 크게 힘찬 운필을 하여 나타냈다. 이러한 서체적 경향은 우암과 추사의 한문간찰 서풍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사회평론 제공
우리말은 병신 말입니까(구연상/채륜)
한글전쟁(김흥식/서해문집)
한글날인 9일,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옆에 국립한글박물관이 개관했다. 문자를 주제로 한 국립박물관은 중국 하남성에 있는 국립중국문자박물관을 제외하면 유일하다고 한다. 지난해부터는 한글날이 법정공휴일로 재지정 됐다.

겉으로 보자면 오늘날 한글의 위상은 견고하다. 치열했던 한자혼용론과의 전쟁에서도 승기를 굳힌 것 같고, 영어공용화론이 새롭게 도전해오고 있으나 그 세는 아직 미미해 보인다. 한글의 세계화, 한글의 산업화 등에 대한 얘기가 터져 나온다. 그러나 과연 한글은 안녕한가? 질문을 조금 바꿔보자. 500년 역사의 한글은 앞으로 500년 후에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한글날에 즈음해 출판된 두 권의 책은 한글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한글의 미래에 대한 위기론을 다급하게 발신한다.

‘한글전쟁’의 저자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는 “우리 언어생활이 이미 신문맹 시대에 돌입했다”고 평가한다.

기본품목: 201 마력 2.4 GDi 엔진, 6단 자동 변속기

외관: 신규 라디에이터 그릴, 신규디자인 17인치 알루미늄 휠, 범퍼일체형 듀얼 머플러…

내장: 가죽 & 하이그로시 변속기 노브, 가죽 & 우드그레인 스티어링 휠, 스웨이드 내장…

그는 현대자동차 홈페이지에 나오는 ‘그랜저 기본품목’을 보여주면서 “부동산을 제외하고 일반 시민이 소유한 가장 비싼 재산 가운데 하나인 자동차를 구입할 때 우리는 그 제품의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구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신문맹 시대의 도래가 아니라면 무엇이 문맹인가”라고 묻는다.

‘우리말은 병신 말입니까’를 쓴 구연상 숙명여대 교수는 영어를 못 하면 병신 취급을 받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우리말이 ‘병신 말’이냐고, 그들을 병신으로 만든 자들은 대관절 누구냐고 따진다.

“어제까지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강의하고 논문을 잘 써온 교수들이 오늘 갑자기 영어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더기로 교수 자격이 없는 무책임한 교수로 내쫓기고 있습니다. 존경을 받아 마땅한 교수들이 벙어리 냉가슴 앓듯 대학 사회에서 하루아침에 병신이 된 까닭은 그들이 병신 말인 우리말만 썼기 때문입니다.”

김 대표와 구 교수가 공통적으로 꼽는 한글의 최대 위협은 영어다. 김 대표는 “영어는 오늘날 한글 나라에 떨어진 핵폭탄”이라고 묘사했고, 구 교수는 “우리말은 글자 없이 반만 년, 제 몸에 딱 맞는 글자를 얻고도 한자에 눌려 지낸 지 오백 년, 새 빛이 비추어 힘찬 날개 짓으로 하늘을 날아오른 지 오십 년 만에 다시 영어에 내몰려 병든 몸이 되었으니 그 한이 얼마나 깊겠습니까?”라고 통탄했다.

영어의 범람은 갈수록 확대되고 깊어진다. 한자혼용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영어 범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 일쑤다. 이 시대 영어 숭배 현상에는 세계어라는 권위, 성장담론, 신분상승의 욕구 등이 연결돼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말은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싸구려 또는 이류가 됐고, 영어를 모르면 병신 취급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언어생활과 학문세계에서 영어 사용이 계속 확대된다면 한글은 표기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경고다. 특히 구 교수는 영어로 강의하기, 영어로 논문쓰기 등 대학들이 영어를 학문어로 강제하는 추세에 대해 강력 비판하면서 한글이 처한 학문어로서의 위기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영어가 외부적 위협이라면 한글은 내부적으로 조어력(造語力) 빈곤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게 두 저자의 공통된 분석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문물이나 학문을 우리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어력 문제는 외국어의 무차별적 수용을 불러오는 요인이기도 하다. 조어력 문제에 대해 김 대표는 한자를 포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하며, 구 교수는 대학의 영어 광풍이 우리말로 논문쓰기, 우리말로 학문하기를 가로막고 있다며 이를 부추기는 언론사의 대학평가 제도를 고발한다.

병신, 암, 전쟁 등 한글을 다루며 두 책이 구사하는 표현은 꽤나 격렬하다. 한글의 안부에 대해 우리가 그간 너무 무심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한편에서는 혹시 위기를 과장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글은 지난 500여년 거의 언제나 위기였다는 사실이다. 한글의 역사가 얼마나 취약한 상태로 이어져 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위기라는 점에서 두 저자의 경고는 들어볼 필요가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미국 유학파가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로 편입되는 날, 대한민국은 이미 대한민국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김흥식)

“현재 많은 상위권 대학들은 ‘영어로 강의하기’ 비율이 40%를 넘고 있다. 우리 대학에서 ‘우리말로 강의하기’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질 날이 올 수도 있다.”(구연상)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