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벤처회사가 '푸드앤박스'라는 사물인터넷(IoT) 기반 식자재 유통 전용 단말기를 시장에 들고 나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한국외식산업정보화센터'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의 이 스타트업은 지난달 말 SK텔레콤의 3세대(3G) 통신망을 이용한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가을 햇볕이 따갑던 지난 1일 오후 경기도 용인에 있는 푸드앤 사업장을 찾았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자 한적한 골목 어귀에 4층짜리 건물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건물 2층으로 들어가니 17㎡(약 5평) 남짓한 방 문 앞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습니다. 이종훈(37) 대표입니다.
두 번의 사업 실패 끝에 태어난 '세상에 없던 IT 기기'
“식당 점주들을 위해 큼직한 화면과 쉽고 편리한 사용자환경(UI)을 갖춘 식자재 주문 전용 단말기가 필요했어요. 장사하면서 식자재를 주문하려고 PC나 스마트폰을 뒤적거리기가 얼마나 번거롭습니까.”
이 대표는 물품을 주문하는 가장 직관적인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복잡한 식자재 유통 구조 때문에 외식업주들이 지출하는 비용이 큰데 이 단계를 줄여 경영 부담을 낮춘다는 취지였습니다.
푸드앤박스 사용법은 간단합니다. 단말기를 켜면 상품들의 가격과 정보가 나옵니다. 제품 사진을 터치하면 결제 화면이 뜹니다. 결제가 완료되면 푸드앤은 생산지에 물건을 주문하고, 생산지에서 식당으로 물품을 배송합니다. 도매상도 중간도매상도 거치지 않습니다.
이 사업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지난 2년간 사업을 두 번이나 말아먹어 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투자증권과 삼성증권에서 근무하다 2012년 회사를 나왔습니다. 방송사와 계약을 맺고 드라마를 소장용 상품으로 만들어 일본에 수출했습니다. 한류 콘텐츠 사업이었던 거죠.”
하지만 이 대표는 곧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라마 판권을 산 일본 방송사가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고, 유통망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이후 골퍼들을 대상으로 모자에 부착하는 필드마스터(거리측정기) 장사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제품이다 보니 시장에 진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상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체득하게 된 거죠. 복잡한 유통 구조 때문에 소비자 가격이 원가보다 지나치게 오른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우린 학창시절부터 공부는 뒷전, 사업 구상에 머리를 맞댔어요"
왜 멀쩡한 직장을 그만뒀을까 문득 궁금해져 이 대표에게 물어봤습니다.
“학창시절에도 공부보다는 닭꼬치, 붕어빵을 파는 스낵카 장사 같은 데만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졸업 후 증권사에 입사하게 돼 기업연금팀에서 일했는데, ‘정작 나는 이러다가 퇴직하면 뭘 하고 살지?’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요. 큰 꿈을 안고도 두 번이나 사업에 실패한 이 대표에게 항상 사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나이 많은 대학 후배 이승준(39) 푸드앤 이사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이 이사가 보기엔 이 대표가 내놓은 사업 구상이 이번에도 영 성공할 것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푸드앤박스는 처음에 식자재 주문 전용 단말기가 아니라 식당 테이블 손소독기에 설치하는 광고 플랫폼으로 구상됐습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이 단말기로 광고 수익을 얻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았어요. 자금력도 충분치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이사의 이런 분석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넥센 야구단에서 2년 반가량을 광고영업팀장으로 일한 경험 덕분입니다. 마침 소셜커머스 업체 쿠팡에 있던 그도 사업이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던 시기였습니다.
“쿠팡에서 일하면서 쇼핑 플랫폼의 성공을 경험해 보니 이 사업에 뛰어들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가격이 싸면 매출이 일어날 것이고, 사업이 잘 돌아가게끔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모든 게 빠른 시대, 플랫폼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18년간 머리를 맞대 온 두 사람은 이 사업의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을지 이 대표에게 물어봤습니다.
“푸드앤박스를 통해 식당 주인들의 구매 패턴을 바꾸는 게 중요합니다. 단말기를 1년 안에 전국 식당에 8만∼10만대 정도 공급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러면 향후 1∼2년 내 1000억원 수준의 연매출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너무 낙관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가 무섭게 다음 말이 이어졌습니다. “5년, 10년 뒤에도 이런 형식의 단말기가 잘될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플랫폼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거니까요.”
곧바로 이어진 ‘비관적 전망’에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 대표는 곧바로 말을 이었습니다. “2차 사업 모델로 위치 기반 비콘(beacon) 서비스를 시작할 겁니다. 푸드앤박스 단말기를 식당에 무료 공급하면서 비콘을 설치하는 거죠.”
비콘은 저전력 블루투스를 활용한 차세대 근거리 데이터 통신기술입니다. 비콘이 설치된 식당에 방문하는 고객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할인쿠폰, 메뉴 정보 등을 받을 수 있고, 식당은 앱으로 고객을 관리할 수 있습니다. 비콘 서비스는 애플과 SK플래닛 등이 활발하게 추진 중인 사업입니다. 푸드앤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스타트업이지만 이 흐름에 동참해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어가겠다는 겁니다. 그때서야 ‘향후 5년을 알 수 없다’는 앞의 말이 이해가 됐습니다.
"고추밭에서 울면서 계약서에 사인하던 날 잊을 수 없죠"
이 대표는 SK텔레콤에 고맙다고 했습니다. “다른 회사는 저희를 회선 증설 대상으로 봤지만 SK텔레콤은 사물인터넷 사업 파트너로 보더군요. 사업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함께합시다’라며 저희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이 사업은 통신,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3박자가 맞아야 할 수 있는 건데 우리 같은 작은 스타트업이 독자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고추밭에서 눈물을 흘리며 계약서에 사인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감격적이기도 했지만 사실 너무 맵기도 했기 때문이죠. 경북 영양, 전북 순창 등 식당업주들이 선호하는 산지의 상품을 찾기 위해 매일 3만원짜리 모텔방을 전전하며 고추밭을 헤맸다고 합니다.
쌀 공급처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답니다. 영농조합에서는 주로 억원 단위로 거래가 이뤄지는데, 개별 식당에서 주문하는 규모는 그에 비해 턱없이 작아 공급하겠다는 곳을 찾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납품하겠다는 업체가 나타나 사업장으로 찾아갔지만 엄청난 수수료와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중간도매상이었던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군청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읍소’한 끝에 몇몇 지역 영농조합과의 거래를 성사시켰습니다.
힘든 건 거래처를 늘리는 일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는 데 대한 가족들의 반대와도 맞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내 사업을 꾸려간다’는 뿌듯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단말기를 설치한 식당 사장님들을 만나면 ‘정말 편하다’고 이야기하고, 제품에 대한 문의도 늘어납니다.
한여름에 단둘이 정장을 차려입고 논밭을 헤맨 결과가 이제 조금씩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동지’는 오늘도 다짐합니다. “재료 가격이 낮아지면 상품 가격도 안정되고 질도 나아지겠죠. 생산자는 확실한 판로를 확보하는 거고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윈윈’하는 외식업 선순환 구조를 만들겁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슬로 뉴스] 바쁜 식당, 장보기라도 쉬워야죠
입력 2014-10-10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