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대구 북구 칠성동에 위치한 성광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이념으로 설립된 미션 스쿨이다. 가정은 어렵지만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인 학교였다. 특히 김진홍 고명진 김승동 박무용 목사와 같은 크리스천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
입학 후 학교취업센터가 알선해준 대구 동구 신암동에 있는 ‘일흥라사’라는 양복점에서 난생처음 돈벌이를 시작했다. 잔심부름은 잘했지만 양복점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두 번째로 취업한 곳은 북구 침산동에 있는 우산(양산) 조립 하청공장이다. 하루 종일 우산을 조립하면서 허리 한번 펴는 것이 눈치가 보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일이 늦게 끝나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다. 눈이 피곤해서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제가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공부하는 것이 목적인데 눈이 피곤하지 않고 공부하는데 지장이 없는 직장을 주세요”라고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한 지 거의 한 달 만에 대구소방서 장비계(경리업무) 급사로 세 번째 직장을 얻었다. 소방서 급사로 취직했을 때의 기쁨은 나중에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나 늦깎이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보다도 더 컸던 것 같다. 무엇보다 삼촌의 단칸방에 신세지는 게 너무나 미안했는데, 소방서에서는 사무실 옆에 직원들이 대기하는 조그만 방 하나를 얻어 잠을 잘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공부할 시간이 모자랄 때는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공부 때문에 피곤한 몸으로 낮에는 급사 일을 해야 했지만 익숙하지도 않고 눈이 침침해지는 양복점이나 우산 공장과 비교하면 소방서는 천국 같았다. 소방관 분들도 나를 가족처럼 대해 줬다. 한밤중에 화재 신고가 들어오면 불을 끄러 같이 가기도 하고 운동이나 식사를 함께하기도 했다. 소방서 직원들은 무엇보다 학교 공부하는 데 늦지 않도록 퇴근시간을 배려해 줬다.
2년 전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갔을 때 소방서 급사 시절 나를 격려해 주고, 친아들처럼 챙겨주던 이갑선 당시 장비계장을 45년 만에 극적으로 만났다. 연세가 아흔이 됐는데도 건강한 모습이었고 나를 알아보고는 크게 반가워해 줬다.
남들의 눈에는 소방서 급사, 불쌍한 고학생으로 보였겠지만 나는 새벽마다 기도하며 미래의 비전과 꿈, 희망과 용기를 충전하며 누구보다 당당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언제나 잘 웃는 사람, 의욕과 생기가 넘치는 청년, 공손하면서도 열심히 노력하는 당당한 청년으로 평가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위기에 몰리고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현실과 환경이 눈앞에 닥쳐와도 현실과 환경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분께 내 마음과 생각을 의탁했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소방서 급사를 그만둔 후 사회 진출을 위해 기도하던 중 가까운 친구에게서 제안이 왔다. 친구의 부모가 당시 ‘구미 전자공단 건설현장’ 인부들에게 밥해 주는 함바집을 운영했는데 여기서 막노동을 하며 사회 밑바닥부터 함께 경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추운 한겨울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허허벌판 임시천막 속에서 먹고 자는 노동자들과 함께 막노동을 시작했다. 일이 끝난 밤에는 그들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울분과 애환을 나눴다. 이때의 경험은 우리 사회 사각지대의 한 부분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한 달 넘게 ‘구미전자공단’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통을 메고 잡일을 하면서도 ‘오늘 내가 잡일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 사회를 선도하는 주역이 되겠다’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 정보화 사회에 대한 소박한 꿈과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 기도가 오늘날 공학박사를 만들었다.
공사장 막노동 일을 경험한 후 나는 비장한 각오로 기도하며 내 인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해 결단했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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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0-09 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