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를 바라보는 한국은행의 시각이 사뭇 과감해졌다. 한은은 지난달 말 발표한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에서 “고신용·고소득 차주를 중심으로 가계부채가 증가하는 점을 고려하면 단기간 내 부실화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밝혔다. 상환능력이 있는 이들이 돈을 빌리고 있기 때문에 가계부채는 질적 개선세에 가깝다는 진단이었다. 증권가에서는 이 주장을 받아 은행업종에 대한 투자 의견을 밝게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7일 국정감사에서는 이러한 한은의 시각이 퍽 단선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완화, 금리 인하 등이 이뤄진 8월부터의 통계를 포함하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새정치민주연합 최재성 의원은 한은에서 제출받은 ‘차주특성별 은행 가계대출 잔액 현황’ 자료를 공개하고 “정부가 중·저소득 계층의 대출 증대를 통해 경기부양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8월 한 달간 가계대출이 4조5000억원 증가했는데, 이 중 68.8%인 3조1000억원은 연소득 6000만원 이하 중소득층(1조8000억원), 연소득 3000만원 이하 저소득층(1조3000억원)의 몫이라는 폭로였다.
실제로 저소득층·저신용층·다중채무자 등 ‘가계부채 고위험군’의 빚 증가세는 커지고, 동시에 상환능력은 악화되고 있다. 느닷없는 은퇴에 창업자금을 빌리고 불황에 다시 생활자금을 대출하는 자영업 베이비부머가 늘며 이들의 빚도 새로운 위험요소로 부상한다. 한국산업은행은 최근 ‘국내 가계부채의 구조적 특징 및 시사점’ 보고서를 펴내고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안정세지만 여전히 경제성장률보다 높다”며 “통계청의 가계금융조사 결과로 추정하면 지난 6월 말 자영업자 부채 규모는 370조원을 상회한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사업자의 대출 증가액은 2010년 5조3000억원이었지만 올해에는 상반기에만 7조9000억원을 기록 중이다. 이들의 부채는 부동산 가격 하락에 특히 취약하다. 자영업자들이 빌린 돈 중 LTV 60%를 초과한 비중은 40.1%로 비자영업자(17.5%)보다 훨씬 높게 집계된다.
다중채무자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경고도 여전하다. 국민행복기금 출범에 따라 다중채무자의 숫자는 소폭 줄었지만 이들이 지는 빚의 크기는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다중채무자 1인당 가계대출액은 2010년 말 8910만원에서 지난해 말 9610만원으로 증가했다.
한은 국감에서는 최근 규제 완화와 경기부양을 위한 통화정책이 가계부채에 악영향을 준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가계부채 증가세에 더욱 고삐를 죄고 고위험군의 모니터링을 강화할 때라는 지적이었다.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은 “기준금리 인하와 부동산 금융규제 완화로 가계부채의 고삐가 풀렸다”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이성태 전 한은 총재 등 외부에서는 가계부채 위험성을 경고하는데 정부와 한은은 ‘아직 괜찮다’고 한다”고 지적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오제세 의원은 영화 ‘명량’에 빗대 “빚을 늘리는 부양책에 한은이 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의원은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이기기 위해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선조의 어명마저 어겼지만 원균은 결국 부산포를 공격해 해군이 전멸했다”며 “한은은 원균의 공명심, 선조의 잘못된 판단력과 달리 경제를 판단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경원 박은애 기자 neosarim@kmib.co.kr
가계빚 고삐 풀렸는데… 대출 늘려 경기 띄우려는 정부
입력 2014-10-08 0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