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여수에서 올라온 94학번 여대생은 ‘서태지 빠순이(운동선수나 가수, 배우 등을 쫓아다니며 응원하는 여성)’였다. 우연히 방송국에서 마주친 인기 가수 서태지가 건네준 과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했다. 여대생은 하숙방 남자 동기가 그 과자를 먹어 치우자 세상의 모든 걸 잃어버린 것처럼 분노했다.
세월이 흘러 ‘서태지 빠순이’는 그때 그 과자를 먹은 동기와 결혼했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케이블 드라마 tvN ‘응답하라 1994’ 속 이야기다.
지난 8월 서울시 지하철 2호선 역 스크린 도어의 티저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서태지의 대표곡 ‘컴백홈’ 가사의 일부인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서태지컴퍼니는 “‘컴백홈’이 발표됐을 당시 청소년 또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세대들이 30∼40대가 됐다. 이들에게 다시 한번 밝은 미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세상의 모든 ‘서태지 빠순이’들을 위해 5년 만에 컴백하는 서태지. 20일 9집 앨범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그는 한때 ‘문화대통령’으로 불리며 가요계를 호령했던 시절과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청춘의 우상에서 옆집 오빠로=다른 세상 사람이라 생각했던 서태지는 알고 보니 예쁜 딸을 낳은 아내 이은성을 위해 빵집을 찾는 ‘옆집 오빠’ 같은 사람이었다. 서태지는 과거 배우 이지아와 결혼한 뒤 이혼 소송에 들어가면서 본의 아니게 사생활이 노출된 뒤 신비주의를 버렸다.
컴백하는 모습에서도 친근함이 느껴진다. 서태지와 아이유의 콜라보레이션 곡 ‘소격동’은 아이유 버전을 먼저 공개했다. 자기보다 아이유를 먼저 내세운 것이다. 10, 20대 젊은 세대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려는 전략으로, 과거 ‘문화대통령’으로 불리던 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앞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선 자신의 노래 ‘너에게’를 성시경이 부르는 데 동의하기도 했다. 그의 노래를 다른 가수가 리메이크한 것은 처음이다.
9일 방송되는 KBS ‘해피투게더’ 출연도 결심했다. 2004년 SBS ‘최수종쇼’ 이후 10년만의 예능 나들이다. 음원 유통 방식도 유연해졌다. CJ E&M을 통해 자신의 음반을 유통할 예정이지만 아이유 버전의 ‘소격동’은 아이유 소속사인 로엔 유통에 맡겼다.
친절해진 서태지는 어느덧 아기 엄마가 된 30, 40대 여성 팬들을 위해 공연장에는 놀이방 시설까지 마련했다.
◇흔들리는 서태지 왕국…음악으로 답해야=서태지 왕국에 균열이 생긴 계기는 이지아와의 스캔들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악플에 시달리며 이미지는 실추됐다. 뉴 메탈의 6집과 하드코어 펑크에서 파생된 이모코어를 도입한 7집을 내놓은 뒤엔 영미 트렌드를 따라하는 ‘장르 수입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30, 40대가 된 팬들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사이 서태지 문화를 모르는 10, 20대가 누구보다 그에게 날선 공격을 퍼부었다.
가요계 관계자는 “현재 가요시장을 움직이는 건 10∼20대”라며 “그들과 소통하지 않는다면 서태지가 예전의 위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콘서트 티켓 판매 성적은 기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18일 컴백 콘서트가 열리는 서울 송파구 잠실주경기장 규모는 3만여석. 서태지 측은 지난달 1차 티켓판매분 6000장이 20분 만에 매진됐다고 밝혔지만 인터넷 예매 사이트에는 빈 자리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남은 건 음악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서태지 팬들은 이번 앨범이 그의 음악 인생에서 3기라고 말한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1기(1∼4집), 해외에서 활동하며 솔로 앨범을 내놨던 2기(5∼8집)에 이은 것이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서태지는 늘 ‘현재 진행’을 추구하는 사람인데 ‘소격동’ 하나로 평가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지만 완성도가 떨어졌다”면서 “어떤 장르의 앨범이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면서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친근한 음악을 선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서태지, 신비주의 걷어내고… ‘옆집 오빠’로 돌아왔다
입력 2014-10-08 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