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손수호] 엉터리 공공언어 부끄럽다

입력 2014-10-08 02:30

중년의 구보씨가 아침에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쥔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패턴을 그리니 ‘죄송합니다. 다시 시도하세요’라고 한다. 죄송?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나? 기기에 따라 단도직입으로 ‘패턴 잘못’이라는 경고문구가 나오기도 한다. 인터넷에서 아이디(ID) 중복 여부를 확인할 때도 이미 사용 중이면 ‘죄송합니다’가 뜬다. 과공비례, 사과가 잦으면 진정성이 의심 받는다.

이런 적도 있다.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내려다 조작을 잘못해 되물리려 하자 ‘취소하시겠습니까?’라는 글과 함께 ‘확인’ ‘취소’ 가운데 하나의 선택을 요구한다. 혼란스럽다. 여러 차례 노력 끝에 ‘확인’을 누르면 ‘취소’가 되고 ‘취소’를 누르면 원위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차라리 ‘네’ ‘아니요’로 하면 수월할 것을.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교통카드 충전기에는 ‘충전하실 금액을 투입하여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다. 금액, 투입? 글이 관료들의 몸처럼 굳어 있다. 공문서에나 쓸 용어를 시민들에게 내뱉는 꼴이다. ‘충전에 필요한 돈을 넣으십시오’라고 하면 좀 더 부드럽지 않을까. 돈이라는 말에 부담 가질 필요는 없으니.

역내에 진입하면 선전물이 많다. ‘범죄와 무질서, 미리미리 주의하세요’라는 포스터를 보자. 물론 말귀는 알아듣는다. 소매치기, 성추행 등 지하철에서 일어나기 쉬운 범죄에 조심하고 공중도덕을 지키자는 뜻이리라. 그러나 이런 글은 공공언어의 자격이 없다. 기본적인 문장의 주술관계에서 벗어나 있으니 외국인이 볼까 두렵다.

나쁜 글은 소통을 가로막는다

구보씨는 ‘자동제세동기’를 놓고도 한동안 고민했다. 한자어 ‘自動除細動器’의 뜻이 얼른 들어오지 않았고, 영어 ‘AED(Automated External Defibrillator)’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다른 곳에서는 ‘심장충격기’라고 표시했다. 어느 쪽이 알아듣기 쉬운가. 이뿐 아니다. 의료용어가 얼마나 불친절한지는 병원에 가본 사람은 다 알리라.

지상의 메시지는 어떤가. ‘대중교통 이용으로 행복하게 삽시다’는 플래카드는 난감하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면 행복하고,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하면 불행하다는 이야기? ‘관련주차 아닌 차량이 주차시 견인조치합니다’라는 글도 봤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쓰면 다 글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공사현장의 안내판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마나한 소리를 한다. ‘공사를 시행함에 최대한 시민의 피해가 없도록 안전과 환경을 최우선으로 공사를 시행하겠습니다-현장소장 백.’ 예전에 찍어둔 ‘차집관거 준설공사’는 지금껏 의미를 모른다. 구보씨가 점심시간에 돈을 찾기 위해 현금자동지급기 앞에 섰더니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다. ‘거래 후 매체를 꼭 받아 가세요’ 매체? 미디어? 통장? 자세히 들여다보니 명세표를 받아가라는 이야기였다. 서비스가 생명인 은행마저 이러니 제조업 같은 곳은 어떨까 싶다.

정부·기업서 ‘文解’ 중요성 알아야

하루 일과를 끝낸 밤에 불을 밝히는 옥외광고판은 한 봉사단체가 빌린 모양이다. 그런데 그 비싼 공간에 적은 글이 ‘실명퇴치활동. 그 외의 다양한 봉사활동 실시’다. 콘텐츠가 어찌 저리 빈약할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문화재표시판에서 느끼는 공허감과 비슷한 감정이다. 무릇 글은 소통을 위한 것이니 문해(文解)가 어려운 글은 사회적 스트레스를 준다. 심하면 집단 커뮤니케이션에 장애를 가져온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정부나 기관, 기업의 인재들이 나쁜 글을 내놓을까. 독해를 못하니 표현이 어려운 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문 실력을 갈고 닦기에 앞서 공공언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다.

저녁밥을 먹고 한강 산책을 나섰던 구보씨는 ‘인어공주도 입장불가’라는 글을 읽고 비로소 미소가 피어났다. 얼마 전만 해도 ‘이 지역은 수영금지 구역으로 수영을 일체 금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렸던 곳이다. 나무가 심어진 언덕길에서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밤과 도토리는 다람쥐들에게 양보하세요. 겨울철 양식입니다.’ 568년 전에 한글을 만든 세종도 기뻐할 변화다.

손수호(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