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대준 (3) 고아원 새벽을 깨운 통성기도 “공부하고 싶어요”

입력 2014-10-08 03:28
2012년 8월 강원도 정선군 하이원길 하이원호텔에서 열린 ‘예장 통합 남선교회 전국대회’에서 곽병철 장로(오른쪽 두 번째)와 기념사진을 찍은 주대준 교수(오른쪽). 곽 장로는 주 교수의 고아원 시절 스승이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1960년대에는 중학교 진학률이 절반이 되지 않던 시절이다. 오히려 공부만 잘하면 고아원생은 미국 후원자의 도움으로 중학교 진학이 가능했다. 그 덕에 중학교는 진학했지만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의 기득권과 텃세에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고아원 친구들은 자기들의 밥을 뺏으러 온 이방인처럼 따가운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이들과 어울리며 고아원에서의 생존법칙을 터득했다. 훗날 카이스트 교수로 부임해 7개월 만에 부총장이 됐을 때도 기득권의 텃세는 만만치 않았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의 경험이 이를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고아원은 생활관 건물 2층을 교회로 사용했다. 교회 이름이 단성교회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새벽마다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자손이 창대케 되는 꿈을 꾸었던 아브람처럼 장차 나를 인도하실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벅찬 감격의 기도로 하루를 열었다.

당시 고아원(단성 애육원) 훈육은 원장(故 곽말수 장로)의 셋째 아들인 곽병철 장로가 맡았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꿈과 희망을 주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그를 2012년 8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남선교회 전국대회에서 만났다. 그와 팔순이 된 나의 삼촌(주문옥 장로), 단성교회 장로들이 참석했다. 고아원에서 나를 가르친 스승 같은 형, 삼촌 앞에서 초대형 집회의 강사로 초빙돼 간증집회를 했다.

고아원 생활은 오전 6시에 기상해 점호와 체력단련으로 시작됐고 오후 10시에 취침하는 등 군대 내무생활과 흡사했다. 그곳에서 나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으로 성장했다. ‘나는 다시 인생을 살더라도 고아원 생활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아원은 나를 강하게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숙시킨 가치 있는 곳이었다.

당시 고아원에서 중학교까지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선 고등학교가 있는 경남 진주시나 다른 도시에 진출해야 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게는 의외의 경우도 있었다. 고아원에서 함께 성장한 형 가운데 한 명은 고향에 있는 단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고등학교 장학생으로 갔다. 그 형은 후에 언론계 유명 인사가 됐고, 국회의장 비서실장(차관급)까지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 형을 롤 모델로 열심히 공부했다. 등하굣길에도 손에는 늘 영어단어장을 끼고 다녔다. 심지어 방과후 배추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끔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쳐다보며 나는 ‘언젠가 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거야. 그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해야지’라고 구체적인 목표와 꿈을 품고 공부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부터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의 단을 쌓았다.

마침 집안 삼촌 한 분이 대구 K-2비행장에 공군 부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써 대구에서 낮에는 일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 조카들 공부에 남달리 애정이 많았던 삼촌의 단칸방에 함께 살면서 대구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대구 반월동에 있는 고교입시학원이었던 영수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교 공부를 준비했다. 중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 중에 고등학교에 진학한 친구는 20%도 되지 않았다. 면 소재지에 고등학교가 없어 부모가 생존해 있는 정상적 가정의 친구들도 대부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새벽마다 부르짖으며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