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시키는 대로 노숙인들 섬겼어요”…내일을여는집 이사장 이준모 목사

입력 2014-10-07 02:38
㈔내일을여는집 이사장 이준모 목사가 6일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20년간 진행한 노숙자 지원 사역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인천의 노숙인 중 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노숙인들을 위해 쉼터를 만들었고 사회적기업도 운영했다. 이곳에서 일한 노숙인만 1000여명에 달한다. 지난달 19일에는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내일을여는집 이사장 이준모(49) 목사 이야기다. 이 목사를 6일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하나님의 뜻’을 강조했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대로 한 일이 아니었다며 겸손해했다.

이 목사가 처음부터 노숙인 복지에 관심을 뒀던 것은 아니다. 원래 꿈은 신학 교수였다. 중학생 때부터 신학에 뜻을 둔 그가 신학대학이 아닌 서강대 독문과에 간 것도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해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부를 졸업한 뒤 한신대 신대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 유학의 꿈은 흔들리지 않았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1년쯤 지난 1994년 인천 해인교회가 그의 삶을 흔들었다. 당시 해인교회는 내부 분열로 단 1명의 신도도 남아있지 않았다. 소속 노회였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인천노회는 목회자를 초빙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 목사에게 SOS를 쳤다.

“인천노회의 한 선배가 ‘신학 교수도 좋지만 하나님 집이 문을 닫는다는데 가봐야 하지 않느냐’고 했어요. 저도 정말 가기 싫었죠. 독일로 떠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근데 귓가에 ‘하나님 집이 문을 닫는다’는 말이 떠나질 않더군요.”

그는 집에서 돈을 빌리고 교회 위치를 바꾸면서까지 해인교회를 살리는 데 주력했다. 이 목사의 노력 덕에 97년에는 교인 수가 30명으로 늘었다. 여전히 작은 교회였지만 예배하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덮치면서 해인교회 교인들도 하나 둘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앉기 시작했다. 노숙인 문제를 피부로 느낀 건 이때였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예수님이 부활 후에 갈릴리로 가셨잖아요. 갈릴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이 사는 곳이에요. 한국 사회로 보면 가난한 노동자들이나 노숙인들이죠.”

98년 5월 인천 계양구에 노숙인쉼터를 열었다. 공간이 모자라 이웃 교회 교육관을 빌려 남자 20여명이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그해 12월 여성노숙인쉼터도 만들었다. 여성노숙인들의 다수는 가정폭력 피해자였다. 그래서 2000년에는 가정폭력상담소도 개설했다.

학교 등에서 단체급식을 한 뒤 여분의 음식을 나누는 ‘푸드뱅크’, 노숙인 자활에 필수적인 일자리 마련을 위해 시작한 ‘계양구재활용센터’, 농촌 목회자가 재배한 농산물을 파는 ‘도농살림’ 등도 그의 작품이다. 그가 노숙인 복지에 힘쓰는 동안 해인교회의 목회는 그의 아내 김영선(49) 목사가 맡았다.

유학의 문턱에서 노숙인 복지가로 행로를 바꾼 그는 “사실 해인교회에서 목회할 때도 독일어 어학원을 다니면서 계속 유학을 준비했다”며 “그런데 지금은 교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일의 사회보장제도와 디아코니아 신학에 대해 공부하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셨죠. ‘나는 그리스도의 발길에 채여 굴러가는 돌’이라고요. 사람들은 늘 생각하고 계획을 하지만 우리의 길을 밝히는 분은 하나님 같아요. 저는 그 길을 따라갈 뿐입니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