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사무친 ‘오빠생각’ 남북대표단 회동장 앞 까치발 할머니

입력 2014-10-06 02:48
분홍색 꽃무늬 셔츠를 곱게 입은 할머니가 까치발로 서성였다. 몰려든 인파를 뚫고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가려 연신 안간힘을 썼다. 1950년 6·25전쟁 이후 64년째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기다리는 이등자(72·여·사진)씨는 지난 4일 인천 남동구의 한 한정식집 앞을 몇 시간째 배회하고 있었다.

이날 북한 고위급 대표단은 예고 없이 아시안게임 폐회식을 찾았다. 이 한정식집에서 남북 대표단의 2차 회동이 열리고 있었다. 이씨는 북측 대표단이 인천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남편을 재촉해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이 ‘예쁘다’고 했던 셔츠를 꺼내 입고 은발이 된 머리도 손질했다. 아끼는 옥색 반지도 꼈다. 그는 “북에서 오랜만에 사람이 온다고 하니 마음이 절절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오빠랑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있었을 사람들인 것 같아서…”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씨는 “TV에서 북한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덜컹 한다”고 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이씨는 6·25전쟁 발발 직후 열 살 터울의 오빠와 헤어졌다.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남쪽으로 내려오자 이씨 가족은 고향을 떠나 경북 안동으로 피란했다. 대구 경북고에 다니며 동네 수재 소리를 듣던 오빠였지만 피란 과정에서 정신적·육체적 스트레스로 몸이 급속히 약해졌다. 결국 늑막염에 걸렸고 부모는 행여 아들이 징집이라도 될까 황급히 안동 산기슭의 사과나무 골짜기에 숨겼다.

이튿날 이씨가 피란 물품을 짊어지고 다시 골짜기를 찾았을 때 오빠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게 오빠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그는 오빠의 흔적이 남아 있던 깊은 골짜기의 풍경과 냄새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이씨는 “산 입구부터 사과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데 골짜기를 넘고 또 넘어서 거기에 오빠를 두고 왔었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씨를 애지중지 아껴 주던 오빠였기에 아홉 살 소녀의 충격은 더 컸다. 북한군이 납치했다는 소문만 돌았다. 그렇게 60여년 세월을 보냈다. 오빠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찾기 행사에도 신청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생사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후 1시50분쯤 김양건 대남담당비서가 양복 차림으로 경호 차량에서 내려 한정식집으로 들어가자 양손을 맞잡은 이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씨는 “얼굴이 길고 눈빛이 강한 게 우리 오빠가 꼭 저 모습일 것 같다”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장성한 자식들에게 지금도 틈만 나면 “어딘가에 있을 혈육을 챙기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세상을 떠나도 고향과 핏줄은 남는 것 아니겠느냐”고 읊조렸다. 이어 “이제 우리 둘 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살아서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며 김 비서가 사라진 한정식집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인천=글·사진 정부경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