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 6·25전쟁이 끝날 무렵 지리산 자락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중반에 아버지의 동생을 부산 사범학교로 유학 보낼 정도로 집안은 유복했다. 하지만 행복한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어느 날, 사업 실패로 빚에 시달리던 부모님과 경남 거제도로 떠났다.
거제도에 온 이후 나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던 중 거제도 지세포리 예배당에 눈이 멈췄다. 난생처음 본 예배당이었다. 기독교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을 때였다. 교회 정문에 붙어 있던 ‘주예수를 믿으라’를 보고 ‘주예수’가 나와 같은 주씨 성을 가진 예수라는 이름의 아저씨 집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이 연이어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이 고향에서 친척집을 전전했다.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3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산장교가 됐다. 1980년 당시 육군 대위인 전산장교 신분으로 내무부(안전행정부)에서 운영하는 정부전자계산소에서 프로그램 보수교육을 받았다. 경복궁 돌담을 따라 거닐던 어느 날 사복 경찰관의 제지를 받았다. 그때서야 앞에 보이는 건물이 청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생처음 청와대를 바라본 순간 마음속으로 기도가 흘러나왔다.
“하나님, 청와대에도 언젠가는 전산실이 만들어질 텐데, 그때 제가 저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제게 능력을 주시면 제가 반드시 청와대에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 기도가 나를 변화시켰다. 교육 당시 꼴찌 수준의 프로그래머인 나는 불과 3년 만에 국방부에서 시행하는 국비 유학시험에 합격했다.
청와대를 처음 바라보고 꿈을 품은 지 거의 10년 만인 1989년 청와대 전산실이 창설됐다. 전산프로그램 개발팀장을 공모했다. 난 수십 명의 지원자를 제치고 청와대 근무를 시작했다. 이후 전산직능 공무원이 승진할 수 있는 한계인 전산실장을 넘어 통신처장, 행정본부장, 경호차장으로 승진했다.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이명박 대통령의 경호차장으로 근무하다가 2008년 12월 30일 경호공무원 최초로 정년퇴직을 했다. 전산팀장이 경호차장까지 승진해 다섯 분의 대통령을 모시며 근무한 20년은 경호실 창설 5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청와대를 나온 후에는 KAIST 교수로 부임했다. 7개월 만에 부총장으로 임명됐고, KAIST 개교 40년 만에 최초로 사이버보안연구센터를 설립해 해킹탐지 신기술을 개발했다. 지금은 정보보호대학원을 설립해 석·박사 인재를 양성하며 대한민국 사이버안보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일이 복음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임을 느낀다. 청와대에 근무할 때는 ‘청와대기독신우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섬기며 국가 지도자와 국가안보를 위해 기도의 단을 쌓았다. 또 대한민국 100만 공직자선교를 위해 입법·사법·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아우르는 ‘한국기독공직자 선교연합회’ 창립을 주도했다. 현재는 전국 8000여개 직장선교회의 80만 회원으로 구성된 한국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 대표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나는 엘리트 코스를 밟지도 않았고 두뇌가 썩 좋은 편도 아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와 지성의 집단 카이스트에서 누구도 하지 못한 기적 같은 기록을 세웠다. 이 기적은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세우기 위함임을 고백한다. ‘내게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왜 내가 못해’는 지난 50여년 동안 내 삶을 이끌어온 핵심 키워드다.정리=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
◇약력=△1953년 경남 산청 출생 △미국 Cal. NPS 석사, KAIST 박사 △청와대 전산실장, 정보통신처장, 대통령경호실 경호차장, KAIST 부총장 역임 △현 KAIST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및 사이버보안연구센터 소장,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한국기독교직장선교연합회 대표회장,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누가(의료)선교회 회장, 월드비전 이사
[역경의 열매] 주대준 (1) 내 삶의 키워드는 ‘예수님 안에서… 왜 내가 못해’
입력 2014-10-06 02:51 수정 2014-10-06 1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