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진애] ‘뿌리 깊은 나무’의 이도는 어디에?

입력 2014-10-06 02:20

최근 배우 한석규가 영조로 분한 ‘비밀의 문’에 끌리다가 예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다시보기 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참 매혹적인 드라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거인들이 있지만 ‘글자 창조’라는 프로젝트를 창안하고 실현한 세종은 거인 중의 거인이다. ‘칼이 아니라 말로 통치한다, 외국 글자가 아니라 우리 글자로 소통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만으로도 ‘문(文)’의 기본이자 ‘문치’의 근간이다.

‘한글 창제’가 막연히 대단한 업적으로만 그려질 때의 아쉬웠던 마음이 ‘뿌리 깊은 나무’로 인해 많이 풀렸다. 한글 창제에 얽힌 전후좌우의 동기와 발상과 역학과 고난이 심상찮았을 텐데 역사에 그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아서 항상 의아스러웠었다. 그런데 이정명의 소설 ‘뿌리 깊은 나무’가 그 빈틈을 그럼직하게 그려주었고,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인문적 상상력의 지평을 더 넓혀주었다.

글자란 단순히 글자가 아니다. 누가 소통의 주체가 되고 대상이 되는가, 어디까지 소통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통할 것인가 하는 인간의 조건을 규정짓는다. 이 근본적인 의문을 둘러싸고 왕권과 신권, 한문과 한글, 기득권층과 민중, 왕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역학이 어떻게 작용했을까, ‘뿌리 깊은 나무’는 이를 알게 해준다.

인류 역사가 발전하는 데에는 거대변수만 작용하는 건 아니다. 개인의 믿음과 소신, 한과 소망들이 마치 ‘돌연변이 변수’처럼 작용한다. 흥미롭게도 드라마에서는 ‘세종, 태종’이라는 거대한 이름이 아니라 ‘이도, 이방원’이라는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의 내면이 그려진다.

칼로 권력을 바꾸고 칼로 권력을 지키고자 했던 이방원, 서슬 퍼런 아버지의 이념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세우고자 했던 이도, 그 철학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문(文)’을 세우고,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한글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실천했던 이도. 비록 소설과 드라마에서 그려진 인간의 모습이지만 존경스럽고 인간답다.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다시 한번 품게 만든다.

인간의 이름을 지니며 이 시대의 ‘한글 창제’를 꿈꾸는 이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김진애(도시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