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칼럼] 바리새인과 에스라인

입력 2014-10-04 00:58

이 시대 교회의 위기는 예수님을 닮지 않고도 서슴없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성품이 없어도 교회 활동에 충실한 사람만 되면 누구든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적당한 성경 지식과 교회문화에 대한 익숙함만 있으면 그 밖의 삶은 신앙과 관계없어도 된다. 문제는 그런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아무런 부담과 갈등이 없다면 그것은 평지가 아니라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성도는 언제나 오르막길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사실 오르막길에 있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부담스럽다. 그러나 믿음의 삶은 언제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는 오르막길이다. 오르막길을 포기할 때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기독교인이 되어간다.

신약시대에 그런 사람들은 바리새인으로 불렸다. 바리새인이라는 명칭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경멸받는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던 이들, 위선적 종교생활로 예수님의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것을 비판하면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우리는 그들을 비판하면서 영적인 대리만족을 얻으며 자신은 바리새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바리새인이라는 이름 자체는 좋은 의미다. ‘구별된’ 혹은 ‘분리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포로시대 이후 이스라엘의 신앙을 이끈 지도자들이었다. 타락한 이방문화와 구별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구별된 삶을 추구하고 율법 연구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인이 왜 경멸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오늘 이 시대에 여러 한국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 가장 올바른 교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가장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사는가. 왜 얼마든지 변화시켜도 되는 제도를 고수하기 위해 소중한 관계를 깨뜨리는가. 왜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품고 사랑하지 못하는가. 모두가 바리새인의 증상들이다. 오늘날 이러한 바리새인의 증상은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더 많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나 같은 목회자들에게 먼저 나타난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보다 더 악하고 불의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오늘날에도 목회자들보다 훨씬 더 바리새인처럼 사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 우선적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들의 삶이 성경과 괴리가 클 때는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에스라 7장 10절의 말씀은 왜 목회자들이 바리새인이 더 쉽게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제2차 포로 귀환을 이끌었던 제사장이자 학자였던 에스라는 바리새인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성전이 무너진 뒤 성전 중심의 신앙체계에서 율법 중심의 신앙체계로 전환되었을 때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이들이 바리새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라는 바리새인이 아니었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는 연구와 가르침 사이에 ‘준행함’이 있었다. 만일 에스라의 뒤를 잇는 이들이 에스라처럼 연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이전에 준행함이 있었다면 그들은 어쩌면 바리새인이라고 불리지 않고 에스라를 닮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에스라인이라고 불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교회의 위기는 에스라인이 되어야 할 이들이 바리새인이 됐다는 점이다. 연구하며 가르침을 행하는 이들이 ‘준행함’을 잊었다. 에스라인이 말씀을 연구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준행하기 위해서였다. 타인에게는 자신이 준행한 말씀의 축복을 나누어 주는 것뿐이었다.

반면 바리새인이 말씀을 연구하는 일차적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는 데 있다. 자신의 준행함은 생략하고 ‘연구’에서 바로 ‘가르침’으로 가는 일이 습관이 되어버릴 때 말과 행동은 달라진다. 종교개혁 시대에 오직 말씀을 강조한 것은 포로 후 시대에 율법을 강조하고 개혁을 이룬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에스라로부터 시작된 율법운동이 바리새인들로 인해 위선적 종교가 되었듯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말씀운동이 오늘날에는 말씀으로 포장된 종교가 된 듯하다. 한국교회에 설교와 강의가 넘친다. 그럼에도 변화가 없는 것은 에스라인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이재훈 온누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