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분석] 상처받은 정치실험… 만류에도 떠난 박영선 “폭풍의 언덕서 싸웠다”

입력 2014-10-03 04:29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2일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폭풍의 언덕’에서 내려왔다. 지난 5월 제1야당 첫 여성 원내대표로 화려하게 선출된 지 147일 만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날 여야 합의로 세월호 특별법을 타결시켰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법’을 만들었다는 책임을 지고 원내 지휘봉을 내려놨다. 원조 강경파인 박 원내대표는 재임 기간 의욕적으로 야당의 투쟁 정치 탈피를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좌절됐다. 새정치연합은 다음 주 중 후임 원내대표를 선출한다는 방침이나 ‘박영선 체제’에서 드러난 당내 병폐들은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박 원내대표는 의원들에게 보낸 이메일 사퇴서한을 통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활을 들고 협상이라는 씨름을 벌인 시간이었다”며 “원내대표직 그 짐을 내려놓겠다”고 밝혔다. 이어 “유가족들께는 매우 미흡하지만 작은 매듭이라도 짓고 떠나게 돼 다행”이라며 “폭풍의 언덕에서 힘들어할 때 격려해주신 동료의원들과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박 원내대표는 원내대표 당선에 이어 7·30재보선 참패 후에는 임시 당 대표인 비상대책위원장까지 겸직하면서 제1야당을 이끌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혁적 이미지를 갖춘 대중 여성 정치인으로서 대권주자 반열을 예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후 유가족과 강경파 반발로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두 차례 연속 실패했다. 특히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비대위원장 영입 무산 뒤 터진 ‘박영선 탈당 파동’은 치명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박 원내대표는 사퇴서한에서 “직업적 당 대표를 위해서라면 그 배의 평형수라도 빼버릴 것 같은 움직임과 일부 극단적 주장이 요동치고 있었다”며 특정 계파 수장 및 강경파를 작심 비판했다. ‘직업적 당 대표’는 차기 당권주자로 거론되는 정세균 비대위원을 겨냥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고, 향후 파장이 예상된다.

‘부드러운 직선’, 탈(脫)투쟁 정당 이미지 등을 내건 박 원내대표의 5개월은 당 차원에서도 모험이었다. 선명한 야당 정체성을 중시하는 새정치연합이 당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중도파 대권후보로 불린 손학규 전 대표, 안철수·김한길 전 대표 역시 넘어서지 못한 벽이다. 박 원내대표의 경우 야당 정체성에서는 자유로웠다. 이를 바탕으로 대여 관계에서 부드러운 직선을 실천했지만 당내 소통에서는 투쟁적 스타일을 버리지 못한 게 패착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차기 당권 도전설이 제기되나 당분간 평의원으로서 의정활동에 충실한다는 방침이다. 그는 전날 경기도 안산에서 유가족 면담을 마친 뒤 문희상 비대위원장을 만나 최종 사퇴 결심을 전했다.

대중적 인기가 여전한 만큼 박 원내대표는 와신상담하면서 점차 재기를 노릴 것으로 전망된다. 원활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당내 계파정치의 희생양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수도권 한 중진의원은 “의원들은 탈당 파동으로 박 원내대표에게 크게 실망했지만 당원이나 국민들 시각은 다를 수 있다”며 “행보를 지켜볼 일”이라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가 강경파와 결별해 중도파와 손잡을지도 향후 관심사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박 원내대표 사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원내대표는 영광보다는 어려움을 많이 겪는 자리인지라 임기를 채운 사람이 별로 없다”고 언급했다.

엄기영 기자 eo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