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성의 가스펠 로드] (26) 강도 만난자의 이웃, 브라질

입력 2014-10-04 00:30
강도 만나기 전에 달렸던 아름다운 남미의 길 모습. 칠레 사막을 달리고 야영하며 광야 아닌 광야 생활을 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음울한 기운이 감도는 황톳길 위. 그 여정의 공간 속에서 되돌릴 수 없는 우울한 시나리오가 재생되고 있었다. 지난 2009년 12월 브라질 여정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다.

메인 도로로 나가기 위해 잠시 지름길을 선택한 것이 화근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낯선 자의 방문. 사람들의 퀭한 시선은 일제히 나를 향했다. 열을 지어 늘어선 판자촌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눈동자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혈맥이 뛰놀고 대지의 말발굽 소리처럼 심장이 요동쳤다. 가난을 기저로 살아가는 그들 앞으로 짐 보따리를 가득 싣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이방인의 존재는 그저 먹이사슬의 가장 하위에 있는 희생양일 뿐이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10m 전방에 한 남자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다른 두 남자는 손에 칼을 들고 돌진해 왔다. 남자들은 무방비 상태의 나를 위협하며 자전거의 짐부터 하나하나 낚아채 갔다. 격렬하게 저항했다. 하나 수십 개의 무표정한 얼굴들이 소름끼칠 뿐이었다. 법도 윤리도 소멸된 빈민가는 그렇게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만의 정의인지 모를 일이었다. 가진 자의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는 강제적 집행의 원칙….

마지막에 자전거까지 다 뺏기고 나자 그제야 내 처지가 실감났다. 눈을 감지 않아도 앞이 캄캄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서러운 눈물과 뒤섞였다. 넋 나간 듯이 허망했다.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혹독한 정글의 법칙을 체득하게 된 까닭 때문만은 아니다.

충격이 컸다. 감정적으로도 거대한 파도 같은 이 시련을 감당하기 벅찼다. 도무지 기도할 수가 없었다. 지혜(히브리어로 ‘듣는 마음’이란 뜻)가 필요했지만 내 안의 돋친 가시들로 인한 상처는 나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며칠 동안 나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와의 교제의 끈을 놓아버렸다.

며칠이 지났을까. 어렵사리 몸과 마음을 추스른 나는 다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진리를 여행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은 어딘가 하늘 아래 나를 위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마련해 놓으셨다. 그것이 이 길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리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온 후 약 보름 동안 시련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말을 묵상하며 깊은 지혜를 구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내 마음속에 너의 아픔이 있단다. 견디기 어려운 좌절과 외로움에 맞선 지금을 몹시도 힘겨워하고 있구나. 하지만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 네가 잃어버린 것들이 빼앗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다만 가난한 이웃을 위해 내가 네게서 그들에게 옮겼다고 생각해 보렴.’

참 신기한 일이다. 이때부터 내 마음속에 그들을 향한 긍휼이 싹트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그들의 가족이 그날 밤 희미한 백열등 아래 따뜻한 국물과 푸짐한 고기를 차려놓고 낡은 식탁에 둘러앉아 정겹게 식사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생각만으로도 따뜻한 온기가 감쌌다. 어느 새 난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나는 완전히 복구된 상태로 아프리카 자전거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강도를 만난 길 위의 시나리오는 완결된 한 권의 책 모퉁이에 실리게 되는 하나의 플롯이었을 뿐이었다. 또한 더 깊은 지혜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사람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두 가지다. 뜻대로 살든지 삶에서 뜻을 발견하든지. 그러나 나는 광야에서 이 두 가지를 모두 경험하게 되니 참 감사하다. 내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구속되어진다는 고백이니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인생으로의 초대, 날 사랑하시는 주님은 어떤 상황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문종성(작가·vision-mat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