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선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부끄러움 없이 떳떳하게 떠나겠습니다. 국가대표로서의 지난 시간이 행복했고 또 행복했습니다.”
지난달 28일 인천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인천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110m 허들 예선. 한국 남자 허들의 베테랑 박태경(34·광주광역시청)이 출발 레이스에 섰다. 힘차게 허들을 넘고 달렸지만 기록은 13초77. 전체 9위로 8명이 출전하는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박태경의 마지막 레이스는 끝났다. 박태경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아쉬움과 함께 15년간 달았던 태극마크에 대한 추억이 서린 듯 했다.
박태경은 모든 스포츠의 기초가 되는 육상이지만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 묵묵히 태극마크를 달고 열심히 뛰고 넘었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과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며 척박한 한국 육상에 한줄기 빛이 돼 주었다. 하지만 끝내 금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채 파란만장했던 국가대표 생활을 접었다. 박태경은 “생애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시안게임을 조금은 허무하게 마무리했다”며 “그래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박태경의 노력과 정신은 한국 육상의 밑거름이 돼 후배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김병준(23·포항시청)은 남자 110m 허들 결승에서 13초43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남자 허들 사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따냈다. 김병준은 “나는 박태경 선배를 보고 자랐고, 지금도 박태경 선배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며 “내가 선배의 기록을 넘어섰지만 박태경 선배는 여전히 내 우상”이라고 말했다.
‘사이클의 전설’ 조호성(40·서울시청)도 인천에서 27년 동안의 힘찬 질주를 멈췄다. 1994 히로시마아시안게임부터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40㎞ 포인트 레이스에서 내리 금메달을 따낸 조호성은 인천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유종의 미를 거둔 조호성은 경기 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태극마크에 대한 아쉬움을 곱씹었다.
‘미녀 검객’에서 ‘엄마 검객’으로 돌아온 남현희(33·성남시청)도 인천에서 화려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002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여자 플뢰레 단체전 금메달을 따낸 남현희는 4년 뒤 도하아시안게임과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여자 플뢰레 단체전과 개인전을 모두 휩쓸어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지난해 4월 딸을 출산한 남현희는 불과 17개월 만에 후배들을 이끌고 여자 펜싱 플뢰레 단체전에서 금을 수확했다. 결국 남현희는 아시안게임 3개 대회에 출전해 총 6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어 수영의 박태환(25·인천시청)과 나란히 한국 선수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 타이를 기록했다.
남현희는 “마지막에 확률이 없다고 느껴질 때 포기하지 말고 1%의 확률이라도 남아 있다면 분명히 방법은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인천=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
[인천아시안게임] 세월의 무게 짊어진 태극전사들 ‘아름다운 은퇴’
입력 2014-10-03 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