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대학시절 일이 있다. 그 시절에는 서로가 추억을 남긴다는 이유로 서면으로 취미니 좋아하는 계절이니 미래에 되고 싶은 인물들을 묻는 것이 유행이었다. 누구나 취미는 독서였고 계절은 물론 가을이었다. 그래야 문학도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자 앞에서는 약간 우울과 슬픔과 고민을 풍겨야 매력이라고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계절을 좋아하십니까?” 왜 그렇게 할 말이 없었는지, 알아서 뭐하게. 그러나 “가을요….” 가는눈을 뜨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운 듯 가는 소리로 답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은 우울한 쪽이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온갖 상념이나 자기반성이 필요할 텐데 각성과 자기 모습을 바라보는 계절로 가을을 둔 것은 아닐까. 열매를 거두는 보람의 계절을 접어두고 뭔가 생각에 잠기는 것이 가을답다고 생각한 것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슬픔”이라는 것을 덮지 못한 탓일 것이다. 슬픔의 실체와 연유를 생각해 보는 일은 겨울로 접어들면서 필요한 명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내 나이가 들면서 슬픔이 없는 사람을 아직 만난 적이 없다. 다행이다. 나만 슬퍼하면서 애 타는 것이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랴. 저만하면 참 좋겠다 싶은 부자도, 자식농사의 소망을 이룬 부모들도, 권력자도 그런 사람들에게조차 어쩌다 말을 트고 대화라는 것을 해 보면 놀랍게도 안쪽 가슴에 슬픔이 뭉쳐있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친구 K도 누구나 부러워하는 여자다. 억울하다면 늙는 일 빼고는 없는 친구다. 우아했다. 어느 날 그 친구와 차를 나누면서 갑자기 그 친구가 “흑”하고 흐느꼈다. 나는 “부자 노인도 가을을 타나 봐” 하고 장난을 쳤다.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설핏 웃으며 “사는 게 다 그렇지 뭐”했다. 사는 거라니… 그만하면 상류층에 무슨 사는 걸 운운하는가. 그러나 가을 탓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짐이 있다. 잠시 그 친구는 시인 친구 앞에서 편안하게 슬픔을 내비친 것이다. 좋은 일이다. 슬픔은 꾹꾹 눌러 놓는 것보다 열고 친구에게 보이는 순간에 새로운 내적 힘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감정 아니겠는가.
신달자(시인)
[살며 사랑하며-신달자] 슬픔을 열어라
입력 2014-10-03 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