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충주제일교회] 3·1 만세시위 주도… 치유 목회로 상처 극복

입력 2014-10-04 00:24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1920년대 충주읍성 서문 앞 교회 모습.
옛 충주제일교회 앞 관아. 동헌 청령헌 뜰에 수직(守直)군사 형상을 세워 놓았다.
일제강점기 공출로 빼앗긴 종을 복원해 대예배당 입구에 전시.
역사 도시는 묵향이 배어 있다. 그 성읍 길을 걸으면 고즈넉한 운치가 삶의 밑동을 일깨운다. 충북 충주제일교회를 찾아 나선 길이 그랬다. 충주는 그간 찾아 나섰던 10여개 성읍교회 도시 가운데 경남 진주시에 버금가는 충청도 수읍(首邑)이었다. 지금이야 인구 20여만의 중소도시에 불과하지만 구한말 도청이 청주로 이전(1908년)하기 까지 충북도청 소재지였다.

지난 27일, 충주예총회관(옛 경무청)에 서자 맞은편 충주감영문을 정문으로 한 관아공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공원 안으로 충주목사가 집정하던 동헌 청령헌, 중앙에서 온 관리들이 머물던 제금당, 제금당 부속 건물 산고수청각,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성상을 웅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성읍은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고 하였는데 그 지혜를 갖지 못해 급격히 무너졌다. 조선의 부패는 매관매직을 낳고 외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갔다. 충주감영문을 마주보고 왼쪽으로 300m쯤 가면 복합상영관 메가박스가 나온다. 이 영화관 뒤편이 충주 제일의 번화가 ‘젊음의 거리’이다. 커피·의류 등 각종 브랜드가 이 거리에 늘어섰다. 중원지방 청년들은 ‘젊음의 거리’에서 쇼핑을 한 후 영화를 즐긴다. 그들의 동선은 팝콘처럼 가볍다.

한데 그 메가박스 자리가 중원지방 복음의 시작점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중원지방 첫 교회 ‘서문외(西門外)교회’ 터이다. 지금의 충주제일교회이다. 교회는 1993년까지 88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지금, 그 ‘서문외교회’는 흔적조차 없다.

충주시가 관아를 중심으로 옛 성읍을 복원하면서 각종 표석을 세워 중원 문화의 얼을 기르고 있었으나 전근대와 근대를 가르는 ‘중원지방 첫 교회’라는 표석은 심지 않았다. 그들 탓이라기보다 크리스천의 역사 인식 부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외교회는 1905년 김정현 조사에 의해 초가 8칸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무렵 사람들은 ‘서문외교회’라고 하지 않고 ‘서문밖교회’로 불렀다. 그리고 교회 이름은 충주읍교회, 충주제일교회로 바뀌었다.

충주제일교회는 초기 명칭이 말해주듯 서문 밖에 있었다. 충주읍성 서문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다. 충주읍성(지도) 성곽 안에는 지금의 관아공원과 KT충주빌딩(옛 객사), 충주문화회관, 충주교육지원청, 우체국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현대식 건물은 옛 관아 건물이었다. 관아 건물은 일제 입김에 따라 구성된 ‘성벽처리위원회’(1907년)가 훼손하기 시작했다. 객사는 초등학교(당시 교현공립보통학교), 동헌은 군청(1983년까지 중원군청) 등으로 사용됐다. 일제의 조선 민족성 말살을 위한 계략이었다.

앞서 충주읍성은 임진왜란 때 철저히 파괴됐다가 병인양요를 겪은 뒤 복원·개축 등을 거쳤다. 하지만 1896년 유인석 의병부대의 충주성 전투 중 서문을 포함한 대부분 관아 건물이 또 한번 불타고 만다.

망국을 앞둔 조선…1884년 기독교의 전래. 그러나 한양에서 이 먼 충주에까지 복음이 미치지 못했다. 때문에 백성은 내세에 의지했다. 그렇게 선교사들이 남한강을 넘지 못하자 충주 지역에선 ‘태평천국’과 같은 사이비 기독교 종교 집회가 열려 백성을 혹세무민 속으로 빠뜨렸다.

‘그리스도신문’ 1902년 4월 24일자는 ‘…교회를 빙자하야 가지고 취군작당하야 수백 명을 모흐고 법 업는 일을 만히 행할 때에 그중에 박운이라 하는 자가 잇서 괴수가 되어…’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 정치·사법 사안까지 예수 이름을 파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놀란 조선기독교장로회는 전도인을 충주에 급파, 전말을 파악한 뒤 선교사와 전도인을 남한강 뱃길을 통해 파송한다. 복음은 그렇게 전래됐다.

1905년. 중원 제일의 도시 충주에 서문외교회가 세워졌다. 조선인 전도사(조사)를 모신 첫 민족 회중 교회였다. 이러한 충주제일교회의 역사성은 이 교회 첫 목사인 장춘명(1856∼1933)에 의해 급속히 중원 내륙으로 까지 뻗어 나간다. 장 목사는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 1회 졸업생으로 첫 부임지(1912년)가 충주제일교회였다. 그는 충주제일교회를 중심으로 34년간 경기 남부와 중원에 83개 교회를 세우고 3000여명을 전도했다. 장 목사는 을미의병(1896) 출신 사역자다. 장 목사는 공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충주관아 동헌에 들어가 지팡이로 마루바닥을 두들기며 충주목사(牧使)에게 호통’(‘이천지방 감리교회사’ 인용)칠 정도였다. 그 동헌이 지금의 청령헌이다. 충주 사람들은 장 목사를 ‘약자 편을 들어주는 의로운 사람’으로 존경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민족교회 성향은 1919년 장 목사의 양손자 장양헌(1898∼1975) 전도사에게 이어져 충주제일교회가 민족운동의 불꽃이 됐다. 충주제일교회 교인 주도의 3·1만세 시위가 전개된 것이다. 일제 재판 기록은 충주제일교회 교인의 만세운동에 대해 ‘악랄한 수단을 농하여 타인을 선동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여…’라고 적혀 있다. 장 전도사 및 교인은 보안법 위반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충주제일교회 공의 정신은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며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골짜기 곳곳에 미쳐 복음의 젖줄이 됐다. 그러나 193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인 청주 출신 정춘수 목사가 한국 교계의 대표적 친일파로 변절하면서 충주제일교회가 속한 감리교단은 민족교회 본질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충주제일교회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일제강점 말기 관제 시국강연회 등을 회당 안에서 열 수밖에 없었다. 황군위문금 전달 등 친일 행위는 회개해야 할 뼈아픈 과거다. 특히 3·1운동 때 만세를 부르고 옥고를 치른 추성렬 속장이 하나님 사랑에 감사하여 교회에 바쳤던 ‘애국종’까지 공출로 내주어야 할 정도로 말씀을 지키기가 어려워졌다. 박해는 그만큼 조직적이고 교묘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자 많은 교인과 목회자가 ‘침묵하는 교회’에 실망하여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제 말과 해방 직후, 6·25전쟁의 혼란을 허숙일·김용련 목사의 치유목회를 통해 극복했다. 그들의 기도 제목은 회개와 화목이었다. 1952년 ‘감리회보’의 ‘충주읍교회에 다녀와서’라는 글에는 ‘매주 600명, 새벽 기도에 400∼500명이 모이는 교회’라고 전했다. 이 같은 폭발적 성장으로 제2 교회 설립에 나섰고 이 교회가 바로 지금의 충주서부교회이다.

1993년 폭발적 성장세를 지속하던 충주제일교회는 ‘서문 밖’을 떠나 2㎞ 떨어진 연수동 현 위치로 옮겼다. 창립 이래 30여 교회를 개척하고 중원의 꾸준한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1000∼2000명이 출석하는 중원 장자교회의 새로운 세기의 시작이었다. 비록 고린도교회와 같은 분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몸된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골 1:18)를 믿었던 회중의 지성이 지경을 넓혀 새로운 예수 성읍을 쌓고 있는 것이다.

"아동·청년 전도에 온 힘… 민족교회 정체성 이을 것"

이병우 목사의 비전


충주는 목회자에게 까다로운 도시다. 옛 도시 사람들의 완고함과 충청도 사람들의 무위이화(無爲而化) 심리가 열매를 맺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고령화 문제도 교회가 직면한 넘기 힘든 장벽이다.

“그러한 어려움은 기도가 아닌 생각에서 나온 방편 찾기라고 봅니다. 전도의 여지가 왜 없습니까? 충주 복음화율이 10% 조금 넘습니다. 교회가 한 세대에 머문다면 고령화와 같은 현실이 벽처럼 느껴지겠지요. 하지만 교회는 한 세대에 머물면 안 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 전도에 손을 놓는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109년 전통의 충주제일교회 이병우(62) 목사는 한 세대를 앞서 내다보고 있었다. 충주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서울 등 대도시로 떠나 영적 자원이 고갈되는데도 청년 전도에 기도로 매달려온 이유다. 분쟁 치유를 위해 3년 전 그가 부임했을 때만 해도 미미했던 청년부가 50여명이 모인다. 중·고등부 50여명, 아동부 80여명, 유치부 40여명이다. 구령이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 얻은 값진 결과다. 이 목사는 “건국대, 한국교통대 학생 전도를 위해 간사를 두고 있다”며 “충주제일교회가 중원의 장자교회가 될 수 있었던 건 늘 미래를 준비해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80년대와 2000년대 교회 분쟁을 심하게 겪었다. 그럼에도 새벽제단을 수십 년간 쌓은 엄창섭(63), 교회버스 운전봉사를 위해 대형면허를 딴 류시원(57) 장로 등이 뿌리 깊은 나무가 돼 분쟁과 이단의 공략 등을 이겨냈다.

“치유의 축복을 받은 교회입니다. 서문밖 교회가 가졌던 민족교회의 정체성을 젊은 세대들이 이어갈 겁니다.”

충주=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