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은 자신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연인이 상대를 보고 “너 이 안에 있다”라고 말하며, 상대를 가리킨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에 대고 두 번 가슴을 두드리는 동작이다. 이는 상대에 대한 최고의 진한 사랑 고백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 관심을 집중하고 생활하노라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없어지고 두 존재가 하나가 된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상태는 두 인격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관심 가지고 사랑하셔서 그분 자신의 마음을 열어 제자들과 인격적 만남을 지속하시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그분 자신은 없어지고 제자들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신자들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행함에 대한 말씀으로 명상(meditate)하고 기도한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고 명하신다. 그래서 신자는 기회가 될 때마다 성경을 읽고 이를 명상하고 기도하면서, 침묵 가운데 그분 앞에서(coram deo) 그분 안에 머무르려고(contemplate) 노력하고 있다. 이는 내 안에 나보다 그분이 역사하기 위해서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이렇게 모시려고 하고 있는가.
그런데 개신교 교인이나 교회, 연합단체를 보면 수면 아래의 갈등과 감정이 툭하면 수면 위로 여과 없이 표출되곤 한다. 심하면 언론이나 사회 법정으로 가서 힘을 과시하고 대중 매체는 이를 반색하며 기사화하기에 바쁘다. 이를 통해 개신교의 사회적 이미지와 신뢰도는 점점 부정적 색깔로 변해가고 있다.
신자나 대중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주님이 어디에 계시다고 생각할까.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의 가슴(heart) 속에 살아 계신다. 주님을 생각하면 그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에 죄스럽고 안타까운 심정 속에 역사하신다. 종교나 지역이나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긍휼의 마음속에 함께 하신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는 긍휼의 소리에 영향 받는 신자들이 많아지는 것에 한국교회 위기의 해법이 있다. 교인의 수가 준다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머릿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마음이 그 가슴속에 살아 있는 진정한 신자들이 점점 늘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였으니 우리도 그의 사랑 안에 거하려는 삶이 교회다운 교회가 진실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연인이 상대를 항상 가슴속에 담고 사는 것과 같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가슴에서 그분의 박동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방향 감각이라도 갖고 드려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하나님을 가슴에 담고자 하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죄스러운 마음이라도 있어야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나는 그런가. 말만 그런 것은 아닌가. 이번 주일은 참회할 내용이 많아질 듯하다.
권명수 교수(한신대 목회상담)
[시온의 소리-권명수] 내 안의 그대여! 어디 있는가
입력 2014-10-03 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