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지 않느냐” 하나님 음성 따르니 탈북 성공

입력 2014-10-02 03:30
한진희(가명) 여명학교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가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소파로의 학교 교실에서 영문법 강의를 하고 있다. 허란 인턴기자

“학교를 정권 유지 수단으로 이용하는 체제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제자를 쥐어짜 받은 돈으로 뇌물을 바쳐야만 교육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 현실도 싫었고요.”

‘탈북 영어교사 2호’ 한진희(39·가명) 여명학교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소파로의 학교에서 자신의 탈북이유를 담담한 목소리로 전했다. 북한 함경북도의 한 도시에서 고등중학교 영어교사이자 ‘족집게 과외교사’로 이름을 날리다 2005년 탈북한 한씨는 올해 6월부터 탈북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서 생활상담 및 보충학습을 지도하고 있다. 탈북 학생 전담 코디네이터는 탈북 학생들이 남한의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남북하나재단이 각급 학교에 파견한 북한 교사 출신 탈북민을 말한다. 여명학교에 탈북학생 전담 코디네이터가 채용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2010년 한국에 정착한 뒤 국내 한 중소기업에 취업해 경리로 일하던 한씨가 다시 교편을 잡은 것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오중흡청진제일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함북 지역의 고등중학교에 배치된 한씨는 학부모들 사이에서 ‘실력 있는 교사’로 유명했다. 김일성대와 김책공대 등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을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유명세 덕에 적지 않은 보위부원이나 부유층으로부터 과외교습 요청을 받았다.

과외 수입이 월급을 넘어서고 영재학급 담임을 맡는 등 승승장구하던 그를 좌절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북한의 교육 체계였다. 한씨는 학생에게 지식과 인성을 전수하는 일보다 학교장과 상부 교육기관에 아첨하는 교사들을 더 후하게 평가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었다. 교장에게 아첨한 교사에게 영재학급 담임을 뺏긴 한씨는 탈북하기로 결심했다. ‘영어를 잘하면 한국에서든 중국에서든 잘살 수 있다’는 지인의 이야기도 계기가 됐다. 그는 ‘뇌물이 능력인 체제에서 일할 바엔 떼돈이나 벌겠다’는 생각으로 2005년 중국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탈북이 곧바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탈북 브로커가 인신매매범으로 돌변한 것이다. 중국의 궁벽한 농가로 팔려간 그는 6년간 타국에서 냉가슴을 앓았다. 고된 삶을 정리하려고 자살시도를 4차례나 했지만 어디선가 ‘내가 있지 않느냐’란 목소리가 들려 번번이 실패했다. 한씨는 이때 들은 음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확신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렸습니다. 한국행도 이 음성의 조언대로 결심하고 움직였더니 5일 만에 손쉽게 태국에 당도했어요. 이 모든 건 하나님의 은혜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한씨가 여명학교에서 만난 학생들 모두 탈북 과정에서 그와 비슷한 사연과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북에서 접하지 못했던 부와 자유를 누리면서도 이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한씨는 일하느라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 부모 대신 아픈 제자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성적이 부진한 학생들에게는 영어·수학 보충수업을 해줬다. 자신처럼 마음이 공허한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은 ‘사랑’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대학과 교회를 설립하고 싶다는 그는 교회부터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탈북 학생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주기를 당부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한 땅에서 혼자 일어설 수 없는 탈북 학생들이 있어요. 공허한 마음 때문에 게임에 빠지거나 무조건 공부를 거부하곤 하죠. 이들의 마음을 사랑으로 채울 수 있도록 누구보다 교회가 먼저 다가와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