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을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께서는 아직도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믿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를 계속하셨다.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기 위해 쏟아낸 질문들에 대한 답변도 실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마 21:23)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관심은 ‘말씀’이 아니라 ‘권위’였다. 그것은 ‘가인’이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의 권위로 착각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고 대답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마 21:31)
율법의 권위자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분은 율법서의 말씀(신 6:5, 레 19:18)으로 대답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달란트’와 ‘므나’에 관한 것이었다. 이는 바로 사람 가운데 감추어 놓은 ‘천국의 비밀’이었다(마 13:44). 주인이 맡겨 놓은 ‘달란트(마 25:15)’ 즉 재능과 ‘므나(눅 19:13)’ 즉 기회를 버려두고 일하지 않은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고(마 25:30)’ ‘죽이라(눅 19:27)’고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도 아들의 당부는 계속된다.
“서로 사랑하라.”(요 13:34)
그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라는 증표라고 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니라.”(요 15:5)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을 주셨다(사 5:1). 사람의 잘못으로 황무지가 된 포도원을 되살리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의 참포도나무로 오셨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그 열매가 제자의 신분증이 되고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가꾸시게 된다.
“그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2∼3)
그 아름다운 꿈을 간직한 채 예수께서는 일어나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향하신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은 제자들의 장래에 마음을 쓰실 수밖에 없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진다(슥 13:7)는 스가랴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신 말씀이었다. 베드로가 나서며 절대로 그런 일 없을 것이라고 하자 그분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며 그에게 당부하셨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예수께서는 기드론 계곡을 지나 감람산의 ‘겟세마네(기름틀)’라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을 거기 남겨 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할 장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갑자기 예수께서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 26:37∼38)
갑자기 무엇을 ‘고민’하신 것일까? 이미 광야의 시험, 가나의 포도주에서 시작해 일관된 응답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오신 그였다. 또 제자들에게 세 번씩이나 자신이 당할 고난과 제삼일에 살아날 것을 예고하며 속건제물로 드려질 것을 다짐해 온 분이니 ‘죽음’이 두려워서는 아닐 것이다. 마가복음의 기록도 거의 비슷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3)
마가는 이 대목에서 ‘심히 놀라시며’라는 표현을 썼다. 예수께서는 무엇에 놀라셨고, 왜 슬퍼하신 것일까? 이에 관해 여러 가지 신학적 연구들이 있으나 어느 것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필자는 ‘레위기’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레 16:5)
그런데 문제는 그 숫염소 두 마리였다.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7∼10)
‘여호와’에 대칭되는 이름으로 나온 ‘아사셀’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악령의 우두머리 또는 마귀라고 본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드리라고 준비해 주신 숫양처럼 자신을 번제물로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속죄제의 숫염소를 생각하고 놀란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은 좋으나 광야로 보내진다는 것은 ‘버림’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수 1:5∼6)
그것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기 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은 건넌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었고, 예수께서도 그 말씀에 힘을 얻어 강하고 담대하게 ‘순종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속죄제물이 된다면 그 일로 인해 광야에 버림을 받을 수도 있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
부르짖는 다윗의 비통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다른 아픔은 다 감내하더라도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의 길을 택하고 걸어왔는데, 그런 후에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안될 일이었다. 심히 놀라고 슬퍼하사 비통하게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그의 부르짖음은 기름틀에서 기름을 짜내는 듯 처절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결국 아들의 간절한 기도는 아버지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쪽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b)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1)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입력 2014-10-03 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