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기말고사 중이던 서울 A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소란이 일었다. 영어로 수업하는 원어 강의의 기말고사 문제가 영어로 출제됐는데, 갑자기 한 학생이 이의를 제기했다. 이 학생은 “말만 원어 강의이지 실제 수업은 한국어로 해놓고 왜 시험문제는 영어로 냈느냐”며 “학생들을 농락하는 것 아니냐”고 거칠게 항의했다.
이 사건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을 낳았다. “영어가 부담스러우면 원어 강의를 피하면 되지 않느냐”거나 “조금만 공부하면 되는 수준인데 이 정도도 안하고 항의하는 건 옳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다. 반면 “천편일률적으로 원어 강의를 이수토록 의무화한 것은 전시행정이다” “정작 교수조차 영어를 제대로 못해 서로 무안했던 경우도 많다”는 반박도 나왔다.
각 대학이 경쟁적으로 도입한 원어 강의를 두고 이처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학들이 신입생을 대상으로 영어시험을 실시한 뒤 성적순으로 단계적 영어수업을 하면서 대학에 ‘영어계급’이 생겼다는 자조의 목소리도 나온다.
◇대학가 영어 스트레스 천태만상=서울의 B대학 1학년 한모(19)씨는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영어 ‘초급반’ 수업을 듣고 있다. 신입생 전원이 치른 영어시험에서 하위 20% 성적을 받아서다. 한씨는 29일 “상위 20%는 고급반에 편성돼 수업도 한 학기만 듣고 성적도 절대평가로 매기는데, 초·중급반은 학점 경쟁이 더 치열한 상대평가”라고 말했다.
영어로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나 발표문도 이들에게는 큰 고민이다. 영어 잘하는 친구에게 “밥 사줄게” 하며 부탁하거나 인터넷 ‘한·영 번역기’ 등을 이용해 급조하기도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서울의 C대학 2학년 김모(21)씨는 “내 실력을 기르자고 공부하는 건데 전체 수업의 절반 정도를 외국어로 들어야 하니 반은 자포자기 심정”이라며 “전공과 무관하게 이렇게 무턱대고 외국어를 가르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졸업을 앞두고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원어 강의를 다 듣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서울 C대학 4학년 강모(26)씨는 영어 스트레스를 이렇게 설명했다.
“동기 중에 아무도 원어 강의 의무이수 시간을 꽉 채운 사람이 없는 거예요. 이게 텍스트만 읽는 게 아니라 영어로 강의를 이해해야 하잖아요. 졸업 요건을 확인해보면 그놈의 영어 강의 때문에….”
학생들의 자체적 공부모임에 들어가는 일도 영어 실력이 가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된 지 오래다. 최근 신입회원을 모집한 C대학의 경영전략학회장 이모(23)씨는 “아무래도 영어를 잘하면 기존 회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다 보니 그런 친구들이 뽑히더라”고 말했다.
◇캠퍼스의 영어 먹이사슬=영어를 곧잘 하더라도 영어 스트레스에서 온전히 해방되는 건 아니다. 이들에겐 자신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사람’이 경쟁 상대다. 7급 외무영사직 시험을 준비하는 대학 4학년 임모(23·여)씨는 “고2 때 토익 800점을 받았을 만큼 영어는 자신이 있었는데, 대학에 오니 외국에서 살다와 서너개 언어를 하는 사람도 즐비하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로스쿨에 재학 중인 정모(28)씨는 “외국에서 살다온 친구들이 전체의 20% 정도 된다. 국내에서 배운 영어로는 상대도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화여대 국제서무학과 석사논문 ‘대학생이 인지하는 영어격차 현상’은 학생들이 영어 실력 격차를 느낄 때 자신감을 상실하거나(30%) 스트레스를 받고(27%) 부러움을 느끼는(20%)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영어 불안감’ 부추기는 대학…형식적 교육 탈피해야=대기업의 마케팅 부서에 근무하는 전모(27·여)씨는 “대학 다닐 때 주변에 영어 잘하는 친구가 많아서 ‘나도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어 공부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런데 막상 취업하고 나니까 영어 쓸 일이 별로 없더라”고 했다. 그는 “법무팀이나 해외영업 같이 정말 영어가 필요한 곳은 외국 대학 출신을 따로 뽑는다”며 “대학에선 영어 못하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지만 취업 도구란 점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덧붙였다.
서울 D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장모(24·여)씨는 원어 강의에 대해 “결국 대학 순위 평가 항목인 ‘국제화 지수’를 높이기 위한 정책 아니냐”고 말했다. 장씨는 “어떤 수업은 교수님이 미리 문제를 2∼3개 내주면 영어로 답을 준비해가서 적는 경우도 있었다”며 “제대로 된 평가도 아니었고 뭘 공부하는지도 모른 채 외우기만 한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 B대학 3학년 정모(26)씨도 “원어 강의를 들을 땐 영어 단어 찾다가 주요 내용 놓치고, 그래서 나중에 다시 한국어로 공부하곤 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문헌정보학과 심원식 교수는 “영어로 된 주제를 주고 검색해보라 하면 학생들이 찾는 곳은 결국 국내 포털 사이트”라며 “대학생들이 학습 과정에서 영어를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주는 교육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 때”라고 조언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기획] 대학 영어 강의, 누구를 위하여 줄을 세우나
입력 2014-09-30 0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