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까지 IS(이슬람국가)는 적어도 3명의 서방 기자들을 참수(斬首)했다. 지난 24일에는 IS의 알제리 무장단체가 프랑스인을 참수했고, IS가 미국과 프랑스에서 지하철 테러를 계획한다는 정보도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은 IS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일 태세다.
세계에는 사형이 존재한다. 그 제도는 비판의 대상이나 2012년 유엔은 사형집행 유예를 결의한 적도 있다. 이 결의안에는 111개국이 찬성했고, 41개국이 반대했다. 한국 등 34개국은 기권했다. 우리나라는 1997년 말 사형집행 이래 지금까지 17년째 집행유예 상태이니, 기권국에서 유예국으로 전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세계의 사형폐지국은 지난해 말 98개국으로, 10년 사이에 10여개 나라가 증가했다. 국제앰네스티(AI)에 따르면 중국 이란 이라크 등의 순서로 사형집행이 많다지만 북한의 경우는 통계가 잡히지 않고 있다.
1세기 전까지 세계 어느 곳에서나 참수는 흔한 일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참수 또는 그 비슷하게 잔인한 형벌이 여러 가지 있다. 사육신(死六臣)이나 남이(南怡·1441∼1468) 장군은 거열(車裂)형,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김옥균(金玉均·1851∼1894)은 능지처참(凌遲處斬)을 당했다. 머리를 시장 또는 건물 입구에 전시하여 경각심을 높인 당시의 제도에 따른 형벌이었다.
모든 임금마다 재위기간 동안 수십 차례의 참수(斬首)나 효수(梟首, 효시·梟市) 등을 한 기록이 보인다. 1398(태조 7)년 9월 3일에는 환관 김사행(金師幸)이 참수형을 받았다. 목을 베어 삼군부(三軍府) 문에 매달았는데, 지금의 정부서울청사 자리였다. 뛰어난 기술자이며 환관이던 그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큰 토목공사를 도맡았고, 조선 초에는 경복궁의 설계자이며 건설 책임자였다. 임금을 오도하고 부패했다는 구실로 목이 베었지만 사실은 정도전(鄭道傳)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해 8월 26일 정도전이 제1차 왕자의 난에 희생당한 지 꼭 1주일만의 일이다. 그리고 그의 목을 친 이틀 뒤(9월 5일) 태조는 세자에게 양위했다.
우리 역사에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참수당한 경우로는 거란군에 희생당한 고려사람 3만명을 꼽을 수 있다. 고려 초 거란은 세 차례 침입했는데, 993년 제1차 침입은 서희(徐熙)의 담판 덕으로 무사했고, 1018년 제3차는 강감찬(姜邯贊)의 귀주대첩으로 승리로 끝났지만 1010년 2차 침략에 고려는 개성을 빼앗기고 임금은 나주까지 피난 갔으며, 강조(康兆)는 크게 패해 목숨을 잃었다. 이때 고려군 3만이 참수당했다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기록하고 있다. ‘참수’라기보다는 ‘전사’였겠으나 기록에는 ‘참수’라 돼 있다.
서양 역사에도 참수는 얼마든지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는 프랑스혁명 때 10달 동안 1만6000명 이상 어쩌면 4만명 가까이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다. 많을 때는 하루 최고 50명이 파리의 광장에 세워진 단두대(기요틴)에서 참수되었다. 이 광란의 주역인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그들을 죽인 로베스피에르 등이 모두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세계의 가장 대표적인 참수극의 본바닥 ‘콩코드 광장’은 원래 ‘루이15세 광장’이었다. 루이 15세의 동상이 거기 있었다. 프랑스혁명 중에 왕의 기마상은 철거되고 광장은 ‘혁명 광장’이라 불렸고, 거기에 단두대를 세워 숱한 사람들의 목을 날렸다. 그러나 혁명이 잠잠해지면서 국민적 화합이 중요하게 된 프랑스는 1795년 그 이름을 ‘화합(콩코드 concorde)’의 뜻에서 콩코드 광장으로 고쳤다. 하지만 계속되는 소용돌이에서 프랑스는 그 이름을 곧 ‘루이15세 광장’(1814) ‘루이16세 광장’(1826)등으로 바꿨다가 1830년 콩코드 광장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인종, 종교, 빈부의 차이 등으로 갈등이 극심한 이 세상에 화합의 날은 언제나 오려는지. 우선 세월호 갈등으로부터의 ‘콩코드’를 보고 싶다.
박성래 한국외대 과학사 명예교수
[여의도포럼-박성래] 참수와 콩코드
입력 2014-09-30 0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