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미경 (14) 고무신 소녀, 성경퀴즈대회만 하면 늘 1등을

입력 2014-09-30 03:12 수정 2014-09-30 09:52
정미경 의원의 빛바랜 돌사진.

주일학교에서 성경퀴즈대회를 하면 내가 늘 1등이었다. 집안 형편상 살 수 없었던 백설공주 그림이 있는 스프링 연습장이 부상이었다. 한데 그렇게 대회 1등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았다. 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를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웠다. 교회에서 기도를 할 때도 구석에서 조용히 했다. 혹시 누가 들을까봐….

“하나님, 저는 나중에 커서 술 먹지 않는 남자랑 결혼할래요. 술 먹고 우는 남자는 더 싫어요.”

그게 내 기도였다. 응답을 원해서 한 기도도 아니었다. 그저 힘드니까 한 기도였다. 나중에 결혼을 한 뒤 남편이 선천적으로 술을 먹지 못하고 먹으면, 온몸에 빨갛게 두드러기가 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주일학교에서 했던 내 기도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초등학교 때 공부는 늘 1, 2등이었지만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앞에서 손들고 벌서던 아이가 나였다. 그 시절에도 몇몇을 빼고는 대부분 운동화 정도는 신고 다녔다. 나는 고무신을 신은 여자애였다. 비가 오면 철떡거리면서 신발이 벗겨지기 일쑤였다. 여지없이 남자애들이 뒤따라 다니면서 놀려댔다. 그래서 새벽에 학교에 갔고, 늦게 집으로 왔다. 교실 내 자리에서 웬만하면 일어나지 않고 책만 읽고 있었다. 되도록 내가 고무신 신고 걷는 모습을 남이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작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책벌레가 되었다.

어둠이 깔린 뒤 고무신을 신고 땅바닥만 쳐다보며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린 내게도 참 서러웠다. 그래서 혼자 중얼거리며 기도했었다. “하나님, 저에게도 장미꽃이 피게 해주세요, 눈물로 장미꽃만 피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울어 드릴게요.” 서러워서 나온 기도였다. 그 당시 읽었던 책애 ‘눈물로 피운 장미꽃’ 그런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운동화가 생겼을 때 내가 달리기를 그렇게 잘하는지 나도 놀랐었다. 고무신 생각이 나서인지 지금도 나는 운동화를 신으면 참 행복하다. 내가 검사가 되어 아버지가 사람들에게 당당해지시는 모습을 보고 그 기도가 떠올랐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주님께 대들며 질문했다. “불쌍한 그 남자(아버지)에게서 왜 그 여자(생모)를 데려가셨습니까.” 아이 낳다가 죽은 생모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가 불쌍하고, 생모가 불쌍하고, 내가 불쌍해서 그랬다. 어린 남매를 두고 죽어가는 여자, 분명 살려달라고 기도했을 생모의 모습이 상상으로 그려졌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살려주었을 텐데….

그러나 하나님은 살려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미칠 것 같았다. 서울의 유명한 책방에서 1년간 책을 읽으며 답을 찾으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포기했고 한동안 그 질문을 잊고 지냈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한 어느 날 우연히 톨스토이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읽다가 답을 찾았다. 나는 잊었는데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다.

천사가 있었다. 방금 여자 쌍둥이를 낳은 병든 여인을 데리고 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여인은 천사에게 남편은 며칠 전에 죽었으며, 자기까지 죽으면 이 아가들은 고아가 되고, 부모 없이 아이들은 살 수가 없으니 아이들이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만 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홀로 돌아갔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전까지는 하늘로 돌아오지 말라는 벌을 받는다. 여인은 하늘로 갔지만 천사는 세상에 남았다. 천사는 구두수선 일을 하면서 살던 중 고아가 된 그 여인의 쌍둥이가 이웃집 여자의 보살핌으로 잘 자라고 있음을 우연히 확인한다.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간들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걱정하기 때문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웃집 여자의 진실한 사랑.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다.

정리=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