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인 그는 왜 히틀러 암살 시도 했나

입력 2014-10-01 04:50
①1913년 어머니 파올라 본회퍼와 함께 한 디트리히 본회퍼(왼쪽 두 번째) 8남매.
②본회퍼가 1939년 미국으로 가기 전 영국 런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③1938년 그로스-슐뢴비츠에서 열린 수련목회자 모임에서 에버하르트 베트게(왼쪽)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는 본회퍼. 복있는사람 제공, 국민일보DB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에 나침반이 될 만한 명저(名著)가 출간됐다.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소천 70주년을 맞아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신학자 에버하르트 베트게(1909∼2000)가 쓴 전기가 국내에서 처음 완역됐다. 1967년에 완성한 이 전기는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본회퍼 전기의 결정판이다.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목회자로 독일교회가 정치 세력과 야합하는 것에 반발해 목숨을 바쳐 소신을 굽히지 않은 투사, 나치에 맞서 그리스도의 양심을 지킨 순교자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본회퍼 개인의 삶뿐 아니라 현대사, 교회 투쟁사, 저항 운동사, 에큐메니컬(교회일치운동) 운동 초기의 단면과 신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본회퍼는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정신과 정신의학 교수 칼 본회퍼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학자가 되고 싶었던 본회퍼는 14세 때 목사가 되겠다고 밝혔을 때 가족들은 모두 놀랐고 반대했다. 가족들은 그에게 교회는 헌신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시시한 부르주아적 제도라고 하면서 그에게 학자나 음악가가 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본회퍼는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개혁하겠다”면서 굳은 의지를 보였고, 그들은 결국 그 결정을 존중했다.

마침내 본회퍼는 17세에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했고 다음해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학문적 재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그가 21세에 쓴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에 대해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1886∼1968)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본회퍼는 3년 뒤인 1930년 2차 신학고시에 합격하고 논문 ‘행동과 존재’로 대학교수 자격을 얻었다.

당시 독일교회는 히틀러에게 호의적이었다. 무너진 독일을 세우고 온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이 시대의 구세주라고 선전했으며, 나치스는 행동하는 적극적인 기독교라고 옹호했다. 나치 독재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저항하기는커녕 히틀러를 그리스도처럼 떠받들었다. 하지만 본회퍼는 히틀러가 총통이 된 이튿날인 1933년 2월 1일 라디오 방송에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제목으로 나치를 맹비난하는 강연을 했다. 결국 방송은 중단됐고 이때부터 본회퍼는 게슈타포의 주적이 됐다.

나치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지만 본회퍼처럼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나치 반대 운동에 나선 신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고백교회’를 결성해 신앙의 양심을 실천했다. 마침내 1941년 베를린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당하기 시작하자 유대인 구출계획 ‘작전 7’을 수행, 히틀러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이 추진됐고 본회퍼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회퍼는 목회자요 신학자였다. 그런데 왜 그는 폭력으로 히틀러를 제거하는 운동에 참여하게 됐을까. 이에 대해 본회퍼는 “어떤 미친 운전자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에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르고 유족을 위로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면서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자에게서 핸들을 빼앗아버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본회퍼는 아마도 억울한 사람들이 무수히 희생되는 것을 방조하는 죄보다는 히틀러를 죽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인식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매순간 가장 적절한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한다”면서 “하지만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본회퍼는 행동하는 목회자였다. 1944년 9월 22일 본회퍼가 포함된 히틀러 전복 음모에 가담한 사람들의 명단이 발견됐고, 그가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증거가 나타나면서 베를린의 게슈타포 감옥으로 옮겨졌다. 결국 본회퍼는 체포된 뒤 2년간 수용소를 전전하다 1945년 4월 9일 새벽 39세의 나이에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의사는 당시 자기가 지켜보고 있는 본회퍼가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10년 뒤 그 의사는 이 같은 기록을 남겼다. “본회퍼 목사가 죄수복을 벗기 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주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신비한 힘을 지닌 사람이 기도하는 방식을 보고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찌나 경건한지,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그는 형장에서 짤막한 기도를 드린 다음 용감하고 침착하게 계단을 밟고 교수대로 올라갔다. 그는 몇 초 뒤에 죽었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의사로 일하면서 그토록 경건하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김순현 전남 여수 돌산 갈릴리교회 목사가 옮겼고 분량이 무려 1468쪽에 달한다. 김 목사가 옮긴 책으로는 ‘인식’ ‘베풂과 용서’ ‘메시지’(이상 복있는사람), 디트리히 본회퍼’(포이에마),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창세기에서 배웠다’(IVP) 등이 있다.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왜 본회퍼인가’를 웅변적으로 말해 준다. 하나님을 만나 그 뜻대로 살다간 사람의 흔적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빛난다는 사실이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