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중동 산유국들은 미국과 그 우방국들이 제4차 중동전(욤 키푸르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원유수출 가격을 70% 인상하고 서방에 대한 원유수출금지(엠바고) 조치를 전격 발표했다. 이로 인해 유가는 4배 가까이 뛰었고 미국에서는 석유배급제가 실시됐다. 미국은 중동발(發) ‘오일쇼크’를 계기로 1975년 ‘에너지정책·보호법(EPCA)’을 제정해 원유 수출을 금지해 왔다. 이 법의 목적은 가능하면 많은 원유를 미국 내에 남겨 수입의존도를 낮추고 불안정한 국제시장의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내 에너지 생산이 급증하면서 40년간 지속돼 온 이 규제를 전면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이런 움직임의 선봉에 미국외교협회(CFR), 민주당의 ‘정책산실(産室)’로 불리는 브루킹스연구소 등 정평 있는 싱크탱크들이 나섰다. 이해관계가 걸린 석유 생산업체들의 주장을 넘어 원유수출 금지 해제 여부가 미국 대내외 정책 전반의 핫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미, 이제는 원유 생산 과잉 우려=원유수출 허용론의 중심에는 ‘셰일 혁명’으로 불리는 미국의 에너지 환경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수압파쇄법과 수평시추 등 채굴 기술의 발달로 셰일(shale·진흙 퇴적층)에서 뽑아낸 원유와 가스 생산이 급증하면서 미국은 올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최대 산유국에 오를 전망이다. 현재 미국의 하루 원유생산량은 약 800만 배럴로 5년 전보다 55% 증가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지난 9일(현지시간) 컨설팅업체 NERA와 함께 공동으로 발간한 ‘변화하는 시장-원유수출 금지의 경제적 이득’ 보고서에서 원유 금수 조치를 ‘전면적이며 즉각적으로’ 해제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우선, 원유 수출을 허용하면 미국의 경제성장, 임금, 고용, 무역 등에 모두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15년부터 수출금지를 해제할 경우 이후 5년간 20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되며, 복지혜택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가솔린 가격이 갤런(3.78ℓ)당 9센트(94원) 하락할 것으로 예측됐다. 미국의 원유 수출은 세계시장의 변동성을 완화시키고 가격을 안정시켜 세계 에너지 안보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전망됐다. 보고서는 “미국이 원유 수출을 늘리면 늘릴수록 미국의 경제적 이득과 에너지 안보도 증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보고서 발간에 맞춰 열린 세미나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 교사’로 불리는 로렌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의회가 법을 고치지 않으면 오바마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동원해서라도 즉각 원유 수출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CFR도 지난해 7월 ‘정책권고’ 보고서에서 “미국 내 에너지 소비가 감소하는데도 원유수출 금지 조치가 유지되고 있다. 이로 인해 이득을 보는 쪽은 소비자가 아니라 미 중부의 정유업체들”이라며 의회가 원유수출 규제를 즉각 해제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에너지 같은 전략물자까지도 공정하고 자유로운 교역을 허용하면 미국의 외교정책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대론자들의 주장=반대론자들은 원유수출 허용이 미국 내 가솔린 가격을 상승시킬 가능성을 우려한다. 로버트 메넨데즈(민주·뉴저지) 상원 외교위원장은 “원유수출 금지 조치가 미 소비자들을 에너지 변동성과 가격 급등으로부터 보호해 왔다”고 옹호했다. 원유 수출이 허용되면 해외 원유 가격보다 낮게 형성되는 미 가솔린 가격을 상승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최근의 미국 내 에너지 증산이 일시적이며 지속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환경보호론자들의 반대 목소리도 높다. 그들은 원유 수출이 허용되면 더 많은 시추와 채굴로 중서부의 물과 토지의 오염과 파괴가 심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결과적으로 화석연료 생산이 늘어나게 되고, 이는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려는 오바마 행정부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지적한다.
◇세계 시장과 우리나라의 영향은=미국의 원유 수출이 허용되면 세계 에너지 가격은 하향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향후 에너지 수요, 허용될 수출 물량,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기존 산유국의 대응 등 여러 변수가 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공급 물량 증대로 국제시장의 원유 가격이 하락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이 경우 중동산(産)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최대 수혜자가 된다.
오바마 행정부는 일단 원유수출 금지라는 큰 빗장을 푸는 대신 천연가스 생산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초경질유(콘덴세이트) 수출을 허용하는 ‘임시방편’으로 대응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미 상무부가 사안별로(case by case)로 허용하는 콘덴세이트의 한국 수출 물량을 늘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의 지난 15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6월 이후 석 달 연속 한국과 유럽에 콘덴세이트 수출을 허용해 왔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
[월드 이슈] 美 40년간 지속 ‘원유수출 규제’ 언제쯤 풀리나
입력 2014-09-3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