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것을 말합니다. 소설가 고(故) 최인호(1945∼2013)도 그렇습니다.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불렸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지난 25일로 1년이 됐습니다. 얼마 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는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늘 유쾌하게 웃던 작가처럼 하늘은 맑았고, 햇살은 따스했습니다. 하얀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을 캔버스 삼아 이런저런 풍경을 수놓던 오후였지요. 열두 살 많은 띠동갑이지만 각별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영화 ‘고래사냥’의 배창호 감독과 배우 안성기, 그를 친형처럼 따랐던 가수 김수철 등 많은 이들이 모였습니다. 최인호 1주기 추모전 개막식이 열렸거든요. 영인문학관은 이어령의 아내인 강인숙씨가 관장으로 있는 곳입니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실물 크기의 최인호 입간판이 웃으며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살아 돌아온 것처럼 말이죠. 이곳에는 생전 작가의 육필 원고, 편지, 사진, 신문기사, ‘원고지 위에서 죽고 싶다’고 쓰인 손도장 등 그를 추억할 수 있는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추모객의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은 곳은 그가 마지막까지 쓰던 서재를 재현해 놓은 곳이었습니다. 침샘암과 불편한 동거를 하던 죽음의 문턱, 글을 쓰던 책상에는 그가 혼자 흘린 눈물자국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지요. 눈물은 생전의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라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고무 골무도 있었지요. 그는 5년간 암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손톱 빠진 자리에 골무를 끼고 새 소설을 썼습니다.
이어령은 최인호를 항상 웃고 쾌활한 사람이었다고 기억했습니다. “어떤 슬픔도 코웃음 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죽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려 책상의 칠이 다 벗겨졌다니. 최인호라 더 가슴 아팠다”라고요. 최인호는 형식과 격식을 싫어했고 멋쩍어했지요. 그래서 이어령은 캐주얼한 옷을 입고 왔습니다. “인호는 늘 나와 만날 때 격식 없이 만났다”면서요.
이어령은 지난해 여름 뇌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지요. 그 짧은 순간, 그는 조각난 바깥세상이 한순간에 휙 지나갔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세상과 저세상의 문턱을 넘나드는 ‘의사 죽음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후 집에만 있던 그를 바깥세상으로 불러낸 사람이 바로 작가였습니다. 최인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죽음의 목전까지 갔던 그가 살아서 처음으로 외출한 곳이 최인호의 영안실이었다니요!
최인호는 딸 다혜를 끔찍이 사랑했고, 그 딸이 낳은 딸(외손녀)을 무척이나 아꼈던 할아버지였습니다. 외손녀 정원이가 그려준, 수줍게 웃는 눈과 코와 입이 그려진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면서 병과 싸워왔지요. 그는 또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상업주의 작가라고 지탄받을 때 그는 태연하게 ‘소설가는 원래 그런 거지’라고 말했지요. 그에게는 점잖은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강 관장은 회고합니다.
최근 만난 소설가 정찬주도 최인호 얘기를 먼저 꺼내더군요. 최인호가 집에 벽시계를 걸어두고 갔는데, 지금도 시계를 볼 때마다 그가 생각난다고요. 보통 작가들은 명절은 쉬는 날로 생각하는데 최인호는 “프로가 명절이 어디 있느냐. 남들이 놀 때 오히려 써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런 작가의 태도가 그에게도 많은 영향을 줬다는군요.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고 글만 써라”고 얘기해준 것도 최인호였답니다.
그가 떠난 자리, 많은 이들이 여전히 그를 추억합니다. 최인호는 갔지만 문단은, 아니 세상은 그를 기억합니다. 아직 그를 정녕 떠나보내기엔 너무 이른 듯합니다.
한승주 문화부 차장 sjhan@kmib.co.kr
[내일을 열며-한승주] 최인호, 눈물로 얼룩진 책상
입력 2014-09-27 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