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은행나무 숲길을 걷노라면/ 내 마음까지 노랗게 물들고 말아/ 나도 가을이 된다. … 이 가을엔/ 차라리 나 스스로/ 노랗게 물드는 은행잎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인 용혜원은 ‘가을에 은행나무 숲길을 걷노라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시골의 가을이 잠자리, 코스모스, 짙은 안개 등에서 시작된다면 도심의 가을은 대체로 은행나무에서 먼저 확인된다. 가로수 은행나무 잎사귀가 노랗게 물들거나 살구처럼 생긴 열매가 발에 밟히기 시작하면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은행나무는 왕벚나무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가로수다. 전체 가로수의 20% 정도이고, 도시 지역은 40%를 웃돈다.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각광받는 것은 기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빙하시대를 견딘 유일한 식물로 알려진 은행나무는 다른 수종에 비해 5∼6배의 산소를 배출해 대기오염 정화 능력이 뛰어나다. 열매는 약재로 활용된다. 문제는 역겨운 냄새다. 은행산과 점액질의 빌로볼 성분인 이 냄새는 천적으로부터 열매를 보호하려는 나무 본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열매의 가운데 껍질이 하얘서 ‘은(銀)’, 모양이 살구 같아서 ‘행(杏)’이라 해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를 ‘은빛살구’라고도 하는 까닭이다. 국내 최고, 최대의 은행나무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사에 있다. 천연기념물 30호인 이 나무는 수령이 11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42m, 둘레 15.2m로 동양에서도 가장 크다. 전국 12그루의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있다. 열매는 암나무만 맺는다. 2011년 산림과학원이 1년 이하 묘목의 암수 감별을 하기 전까지는 15년 정도 자라야 구분이 가능했다. 가로수 가운데 열매가 맺는 암나무가 적지 않은 것도 구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농가에서는 열매를 위해 암나무를, 도시에서는 악취가 없는 수나무를 심는다. 지자체들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암나무를 잘라낸다. 이러다 ‘홀아비’ 은행나무 가로수만 남는 게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지자체들은 가을이면 은행나무 열매와 전쟁을 치른다. 국민일보 본사가 있는 여의도 일대에도 벌써 열매털이가 시작됐다. 태울 듯 따가웠던 볕도 수더분해지고, 가을이 오긴 온 모양이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
[한마당-정진영] 은행나무와 가을
입력 2014-09-27 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