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 목회생활은 쉽지 않다. 모두들 바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성도들을 섬기며 신앙을 지도하는 것이 한국에서의 목회 보다는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부흥집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세계 20여개국에서 예배 컨설팅 세미나를 인도하고 찬양대학원장도 맡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사역을 했다. 이러다 가족과 미국에 온 나는 20여년 전부터 지병으로 갖고 있던 당뇨가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든 사역과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것 등 많은 부분이 작용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항상 기도하면서 주님께 치료를 간구하기도 했고 의사를 찾아 약을 먹고 식단도 조절했지만 병은 점점 중해졌다.
급기야 6년 전 쯤에는 오랜만에 나를 보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살이 빠졌다. 시력이 떨어지고 손저림에 무기력증, 피부까지 이상이 오는 등 심각한 합병증 증세가 와서 목회를 중단해야 할 위기를 만났다. 당뇨 혈당지수가 위험수위를 넘어선 300에서 350까지 치솟았다.
이제는 약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미국의 병원들도 내 증세에 대한 치료에 손을 들다시피 했다. 늘 기도는 했지만 극심한 공황상태가 된 내게 한국의 어머니가 전화를 해 주셨다.
인슐린 펌프를 착용해 효과를 본 방송을 보았다면서 내게도 이 방법을 권했다.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서울의대 출신으로 현직 의사인 처제와 동서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자 “그동안 의사들이 이 인슐린펌프를 인정치 않다가 요즘은 달라지고 있다”며 착용하라고 권해 주었다. 반신반의 했지만 나로선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현대의학이 손 든 나를 치료해 준다는 것에 희망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목회는 극동방송 아나운서 출신으로 신학을 한 아내가 맡아주었다. 한국의 양재최의원-당뇨센터에 2주간 입원해 정밀한 진단을 받고 인슐린펌프를 착용했다. 수술이 아니라 작은 침이 붙은 반창고를 붙이는 정도였다. 너무나 작고 간단해 보이지만 이 기기가 내게 선물해 준 기쁨은 너무나 컸다.
인슐린 펌프를 착용하기가 무섭게 혈당지수가 내려가 정상을 유지하기 시작했고 몸에 힘이 붙고 살이 붙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못먹었던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인슐린펌프가 갖는 가장 큰 장점이었다.
빠른 시간에 건강해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 이 선택이 얼마나 잘한 것이었는지 또 이 기기를 1979년에 처음 개발해 현재까지 발전시킨 최수봉 박사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난 지금 목회 뿐 아니라 미국 롤랜드유니버시티 부총장으로 일하며 건강하게 미국교회들을 돌며 열심히 세미나 사역을 하고 있다. 인슐린펌프를 차기 전에 나를 본 사람은 또 한번 요즘의 내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된다.
벌써 이 기기를 착용한 지 5년 정도가 됐지만 아주 만족스럽다. 그래서 내가 적극 권유해 인슐린펌프를 착용하게 된 사람도 7명이나 된다.
아울러 최수봉 박사님과 엄윤희 사모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써 이웃과 사회에 공헌하고 선교하려는 자세를 갖고 계시다는 점도 내가 매우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끝으로 당뇨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이 인슐린펌프 기기를 통해 새로운 삶을 얻고 승리하게 되시길 적극 추천드린다.
데이빗 전 목사(LA 회복의동산교회)
[기고] 美 LA 회복의동산교회 데이빗 전 목사 “목회 중단 위기 인슐린펌프가 나를 살렸다”
입력 2014-09-30 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