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전장 향해 14박16일… 고뇌의 ‘이순신 길’을 따라 걷다

입력 2014-09-26 04:02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장을 받은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 집 사랑채. 푸른역사 제공


이순신 장군을 다룬 책들은 대부분 해전에 주목한다. 이순신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명량해전 직전의 이순신, 바다가 아닌 땅에서의 이순신을 보여준다.

당시 전황은 최악이었다. 이순신은 관직을 잃고 내륙을 떠돌고 있었다. 1597년 정유년 8월이었다.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장을 받고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계마을을 출발, 전남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까지 14박16일 동안 700리(271㎞)를 걸어 바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명량대첩을 이룬다.

저자 이훈은 ‘이순신 길’을 따라 ‘1597년 8월의 14박16일’을 걸으며 ‘이순신의 길’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독자들은 이순신이 보여준 용기와 신념이 어디서 온 것인지 이해하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 ‘명량’을 보면, 다들 두려워하는데 이순신 혼자만 담대하다. 모두가 승산이 없다고 하고, 임금마저도 수군을 포기한다. 주위 장수들도 하나 같이 해전을 포기하자고 아우성이다. 이대로 바다를 버리고 물러서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이순신은 어명에 맞서면서까지 싸움에 임했을까?

‘이순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순신의 선택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명을 받고 임지까지 16일을 걸어가는 동안 그는 길 위에서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했고, 도망가는 관리들을 숱하게 보았으며, 임금과 조정의 무능력에 치를 떨었고, 왜적들의 분탕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왜장에게 딸을 바치고 권세를 누리는 사람, 왜적 대신 백성의 목을 베어 바치고 공적을 누리는 관리들도 있었다. 임금으로부터 ‘수군을 없애니 모든 군사는 뭍에 올라 싸우라’는 명령을 받고,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며 바다를 향해 계속 걸어간 것도 이 기간이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겠는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을 법 하다. 생지옥에 빠진 백성들을 누가 건져내야 하나? 무겁게 고민했을 법하다. 이순신은 부하 이기남이 언제 어디서 죽을지, 죽을 자리를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자 이렇게 대답한다. “그래? 너만 그러느냐? 나도 이 백성들도 매한가지다. 나라가 기우뚱거리는 판에 이 조선 천지에서 제 죽을 자리를 아는 자가 몇이나 되겠느냐.”

가망 없는 전쟁이었다. 그는 어쩌면 죽으러 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이순신의 용기가 삶에 대한 포기나 완전한 절망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이순신이 걸어간 16일은 수군을 재건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바다로 나아가는 길에서 장정들을 모았고, 왜적의 동태를 수집했으며, 무기와 군량도 긁어모았다. 이 길에서 칠천량해전에서 도망친 배설의 선단이 벽파진에 숨어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12척이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12척이면 당장 앞가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은 이 길에서 싸워볼 수 있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1597년 8월의 14박16일’에 대한 ‘난중일기’의 기록은 하루 서너 줄에 불과하다. 이런 식이다. ‘초7일 무진. 맑음.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으로 가는 도중에 현에서 10리쯤 떨어진 길에서 유지를 가지고 온 선전관 원집을 만났다. 길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병사가 거느렸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후퇴해 왔다. 이날 닭이 울 무렵에 송대립이 순천 등지를 정탐하고 왔다. 석곡강정에서 잤다.’

저자는 ‘난중일기’의 이 빈 공간을 답사와 취재로 채우고, ‘쇄미록’ ‘난중잡록’ ‘이충무공행록’ ‘징비록’ 등 당시의 자료들을 보충해 하나의 흥미로운 역사기행서를 선보였다. 저자는 ‘이순신 길’을 수 차례 답사하며 ‘난중일기’에 나오는 지명의 오류, 날짜의 오기 등을 여러 곳 바로잡았다. 또 이순신이 발 벗고 건넜다고 한 찬수강 물목으로 추정되는 구례읍 신촌마을 ‘나발목’을 발견했고, 이순신이 잔 석곡 강정(石谷 江亭)이 곡성군 석곡면 보성강변의 능파정이라는 걸 밝혀냈다. 이순신이 3박4일 머물렀던 보성 박곡 ‘양산항 집’ 위치가 현재 알려진 집이 아니라 ‘경춘씨 집터’에 있었다는 새로운 추정도 내놓았다.

세상의 어느 길이 이토록 비장했을까? 이순신의 고독하고 무거운 길을 따라 가는 이 책은 ‘길의 내러티브’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전범이라고 할만하다. 이 책을 들고 ‘이순신 길’을 따라 걷는 새로운 도보여행 문화가 출현할 수도 있겠다. ‘이순신 읽기’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새로운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 출판의 갈증도 시원하게 해결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