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안게임] 크리스천 선수들 응원하고 유적지 들러 영성 키우세요

입력 2014-09-27 03:36
인천아시아경기대회 기독인봉사협의회(인기협) 회원들이 지난 23일 인천문학야구장에서 중국과 몽골 선수들을 응원하고 있다. 인기협 제공
인천아시안게임이 한창이다. 선수들의 경기를 응원하는 김에 인천과 강화 주변 기독교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은 어떨까. 인천은 한국 기독교의 관문이다. 미국 북장로회 언더우드와 북감리회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제물포항으로 입국해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강화의 기독교 역사는 1893년 토착민들에 의해 시작됐다. 유적지 탐방으로 흐트러진 신앙을 점검해 보자.

1882년 본격적인 개항을 맞이한 조선은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들은 주로 일본의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항, 그리고 제물포항으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인 서울에 가기 위해서였다. 의료선교사 알렌과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사 등도 마찬가지였다.

26일 인천시 중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제물포항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다만 1918년 당시 제물포항 갑문의 일부 암벽이 인천항 제1부두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일반인의 접근은 어렵다. 아쉬운 발길을 근대건축전시관(중구 신포로길)으로 돌려보자. 이곳엔 1910년 무렵 제물포항의 면모를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다. 제물포항으로 유입된 신식우편이나 통신, 철도 등 근대 문물은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인천개항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교사 등 외국인들이 머물렀던 대불호텔(중구 중앙동)도 있다. 국내 최초 서양식 호텔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이 터에는 내년 말 외형을 그대로 복원한 ‘근대호텔사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린 것을 기념해 1986년 건립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중구 제물량로)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본격적 유적지 탐방은 동인천역 인근의 내리교회(중구 개항로)에서 시작해 보자. 감리교의 모교회인 내리교회는 1891년 현 위치에서 시작됐다. 언덕을 올라 교회 입구에 다다르면 아펜젤러와 2대 담임목사인 존스, 한국인 3대 목사를 역임한 김기범의 흉상을 만난다. 본당 1층 복도엔 교회 역사와 관련된 사진이 시대 순으로 전시돼 있다. 교회에는 1901년 건립된 최초의 서구식 개신교 예배당인 제물포웨슬리예배당이 복원돼 있다. 아펜젤러비전센터 3층 역사전시관으로 가면 교회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내리교회 뒤편 목자관 앞길을 따라 가다가 세탁소에서 우회전하면 언덕 위 오른편에 인천 최초의 성공회교회인 내동교회(중구 개항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중세풍 석조 건물의 이 교회는 성공회 의료 선교사였던 랜디스에 의해 시작됐다. 교회 건물은 1902년 러시아영사관으로 사용됐고 1904년 제물포해전 당시 일본 적십자병원이 설치되기도 했다. 정문으로 나오면 멀리 인천항이 내려다보인다.

영화초등학교(동구 우각로)는 영화학교가 전신으로 1892년 내리교회 2대 담임이었던 존스 목사의 아내 벤젤이 여자 어린이 교육을 시작한 것이 시초다. 영화는 ‘영생’과 ‘교화’에서 따왔으며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본관동이 남아 있다. 본관동은 1911년 완공된 벽돌 건물로 지금도 학생들의 사물놀이 수업 등에 사용하고 있다는 게 학교 관계자의 전언이다.

영화초등학교에서 오른편으로 150m 떨어진 창영사회복지관에는 미 북감리회가 파송한 여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사용된 사택이 남아 있다. 1894년 당시엔 ‘갬블리홈(Gamblee Home)’으로 불렸다. 지금은 창영감리교회가 인수해 관리·사용 중이다. 사택은 교회 건축 관계로 내년 봄까지 볼 수 없다.

국제성서박물관(남구 경인로길)은 세계 최대 성서 박물관이다. 주안감리교회 교육관 5층에 전 세계 90여개 국가에서 수집한 1만7000여권의 성서가 분류·전시돼 있다. 사해사본(1947) 복사본 두루마리 성경(길이 9m)을 비롯해 구텐베르크성경(1456), 루터성경(1526) 등 희귀본을 볼 수 있다. 한국선교역사기념관(부평구 장제로)은 한국 기독교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했다. 부평순복음교회가 대지를 제공하고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2008년 개관했다.

강화는 몽골 침략의 항쟁지로 개항기에 다시 한번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최초의 근대 조약인 병자수호조약(1876) 등을 통해 기독교가 유입된다. 하지만 인천과는 달리 선교사들의 영향보다는 원주민들의 개종과 결단이 많았다.

감리교신학대 이덕주(역사신학) 교수는 26일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른바 강화 7군자로 불렸던 유학파 인물들이 모두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민족 기독교’를 역설했다”며 “이들은 한 동네에 1개의 교회와 학교를 세우자는 운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실제로 1907년 당시 강화에는 20개가 넘는 교회가 세워졌다 한다.

강화 감리교의 모교회는 교산교회(양사면 교산리)다. 1892년 제물포에서 주막을 하던 이승환이 존스 선교사를 만나며 복음의 씨앗이 됐다. 교회는 현재 구 예배당을 기독교선교역사관으로 정비해 자료를 전시 중이다. 교회 주변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홍의감리교회(송해면 상도리)는 강화의 두 번째 감리교회. 1896년 마을 서당훈장이던 박능일에 의해 시작됐다. 이 교회 성도들은 신앙공동체의 일원을 강조하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성(姓)은 그대로 두되 이름 끝자를 ‘일(一)’로 통일했다. ‘일’은 한 가족이란 의미로 이후 돌림자가 됐다. 박능일도 바꾼 이름. 강화중앙교회(강화읍 신문리)는 강화도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다. 1900년 교인 10명이 가옥을 매입, 기도처로 삼으면서 시작됐다. 본당에 사료가 전시돼 있으며 설립 당시부터 있었다는 소나무도 볼 수 있다.

강화에는 토착화된 예배당을 만날 수 있다. 강화읍성공회성당(강화읍 관청리)은 1900년 한옥식 건물로 지어졌다. 사찰처럼 생긴 성당 전체는 배 모양이며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이다. 종각에는 1914년 영국에서 주조된 범종이 달려 있었다. ‘신종(神鐘)’으로 불릴 정도로 소리가 맑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때 징발되며 사라졌고 지금의 종은 93년 새로 주조했다.

온수리성공회성당(강화읍 온수리)은 1906년 영국인 주교 마크 트롤로프 신부가 건축했다. 성당 내부에는 개신교 공동체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 신부의 부인인 제인 토레이 사모가 1959년 그린 ‘강화 온수리’ 수채화 복사본이 걸려 있다. 강화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강화 주변을 이동하면서 만끽하는 가을 풍경은 탐방 여정의 덤이다.

인천·강화=글·사진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