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깊은 연원과 정밀한 뜻이 묘연하여 신 등은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다.”(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중)
조선 세종 당시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소설가 정찬주(61)는 24일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작가정신) 출판간담회에서 “이 소설은 이 문장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작가는 정인지의 글을 이렇게 해석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이 어떤 문자를 근거로 하고 있는지 그 깊은 연원과, 또한 한글의 글자마다 정밀한 뜻이 미묘하므로 창제에 간여할 능력이 없었다. 세종에게 한글창제의 공을 돌리기 위한 겸사일 수도 있지만, 집현전 학자들의 양심선언 또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학자들 말고 누가 한글창제를 도왔는가. 이 소설은 한글창제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야사가 아닌 정사, 즉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풀어나간다.
작가는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은 숭유억불(崇儒抑佛)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유학을 숭상해 한자가 아닌 다른 글자는 언문이라고 천시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 훈민정음을 드러내놓고 만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유신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하지만 세종은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의 도움을 받아 끝끝내 훈민정음 스물 여덟자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이 책에는 이때 세종을 도운,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중요한 사람으로 신미대사가 나온다. 한글과 유사한 범어(산스크리트어)에 통달한 신미대사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정설로 굳어진 ‘세종과 집현전의 한글 창제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셈이다.
작가는 “지난해 범어를 쓰는 남인도에 가보니 범어와 한글 어휘가 유사한 게 1000개가 넘었다. 예를 들어 범어에선 엉덩이를 ‘궁디’로, 거시기를 ‘거세기’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신미대사와 동시대 인물인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도 한글을 범어에 의지해 만들었다는 구절이 나온다고 부연했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한 명(희우)을 빼곤 전부 실록에 나오는 실존 인물. 뼈대는 실제 기록이고, 그 위에 입혀진 살은 허구인 셈이다. 낙향해 전남 화순에서 13년째 지내고 있는 작가는 지난해 10월 집필을 시작해 1년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 조선왕조실록, 사리영웅기 등을 샅샅이 뒤져 역사적 고증을 했다.
추천사를 쓴 소설가 조정래는 “이 책은 소설적 허구가 아닌 진실의 올곧은 복원”이라며 “정찬주가 소설의 존재이유를 확대시키는 동시에 지적 감동에 취하게 하는 큰일을 해냈다”고 평했다.
작가는 “우리가 날마다 쓰는 한글 속에 세종대왕은 물론 많은 이들의 노고가 깃들어져 있다. 한글처럼 과학적인 문자를 쓰는 나라도 드물다. 한글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만하다”면서 “신미대사가 한글창제를 도왔다는 것이 정설은 아닌데 이 소설을 계기로 학계에 연구의 불을 지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승주 기자 sjhan@kmib.co.kr
[책과 길] 한글창제, 세종과 집현전 학자가 했다고?
입력 2014-09-26 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