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권리금 법제화] “그래도 난 구제 안돼…” 발표 당일에도 빗속 시위한 상인들

입력 2014-09-25 04:40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회원들이 지난 6월 서울 마포구의 한 건물 앞에서 ‘상가 권리금 보장’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하라’ 등의 내용이 담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제공

정부가 권리금 법제화 방안을 발표한 24일 오전 10시쯤 엄홍섭(59)씨를 비롯한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맘상모) 회원 5명은 충북 청주로 가고 있었다. 청주에는 엄씨 커피숍의 건물주가 살고 있다. 추적추적 빗속을 걷는 이들이 손에 든 현수막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건물주의 욕심이 임차상인의 목을 조릅니다. 제발 같이 좀 삽시다….’

엄씨는 23년 직장생활을 접고 2011년 서울 서초동의 한 건물에 점포를 얻어 커피숍을 열었다. 권리금 1억6000만원에 보증금 4800만원, 인테리어 비용까지 2억8000만원이 들었다. 퇴직금에 대출을 받아 보탰다. 장사는 잘됐다. 10평 남짓 작은 가게에 단골이 많다.

2년쯤 장사한 지난해 7월 건물주가 이 건물을 재건축하겠다고 알려왔다. 이대로 건물이 헐리면 엄씨는 권리금 1억6000만원을 찾을 길이 없다. 건물주는 점포를 빼라는 명도소송을 냈고 엄씨는 지난달 패소했다. 25일까지 점포를 비우지 않으면 강제집행이 들어온다. 빈손으로 쫓겨날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 현수막을 들고 건물주 집 앞에 찾아가는 길이었다.

청주로 가면서 권리금 법제화 방안을 뉴스로 접했다는 엄씨는 “내 경우 같은 건물 재건축 상황은 입법안에서 빠진 것 같다”며 “이런 법마저 언제 시행될지 모르니 이렇게 현수막이라도 붙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이 권리금 법제화를 약속한 뒤에도 임차상인들의 삶은 엄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에 경기 파주부터 제주도까지 각지의 상인들이 맘상모로 몰려들었다. 2월 200여명이던 회원은 지금 530명이 됐다. 이들은 ‘품앗이’하듯 돌아가며 쫓겨날 위기에 놓인 상인의 점포 앞에서 함께 시위를 벌인다.

임차상인들의 ‘품앗이’ 시위는 그동안 건물주와의 분쟁에서 여러 점포를 살려냈다. 서울 마포구 카페 ‘분더바’, 홍대 앞 ‘곱창포차’, 종로 중국집 ‘신신원’, 부산의 한 골프연습장 등이 그랬다. 네 임차상인은 건물주와 협상해 권리금 일부를 보전 받았다. 경찰서에까지 연행되면서 여름 내내 1인 시위와 농성을 벌인 결과였다.

권리금 법제화 방안이 발표됐지만 상인들은 여전히 여러 허점이 보인다고 우려했다. 정부안은 ‘권리금’ 자체가 아니라 권리금을 다음 상인에게서 받을 ‘기회’를 보장한다. 건물주가 “내가 그 점포 직접 쓰려 하니 나가라”고 하면 또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구백 맘상모 대표는 “점포를 내서 자리 잡으려면 5년은 금방 지나간다”며 “계약보장기간을 10년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도담의 김영주 변호사는 “건물주가 권리금을 인질로 월세를 2∼3배씩 올리는 게 일반적인데 이번 안에는 월세 상승률 제한 규정이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또 “건물주가 해당 점포를 1년 이상 비워두거나 비영리 목적으로 이용할 땐 권리금 회수 의무를 지지 않는데 이 예외 조항을 악용할 수 없게 ‘비영리’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