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1월 22일. 경성의 소화통(퇴계로) 대로변 2층 건물로 잘 차려입은 신사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미술품 경매소인 경성미술구락부다. 일본인 유명 수장가로 저축은행(제일은행 전신) 은행장이었던 모리 고이치(森悟一)가 생전 수집했던 고미술품이 쏟아진 날이었다. 핵심은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 백자로 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이 담긴 도자기다.
500원에 시작한 경매가는 눈 깜짝할 새 7000원까지 올라갔다. 조선백자로 2000원 이상에 팔리던 것이 없던 시절이다. 조선인 컬렉터 간송 전형필의 대리인 심보기조(新保喜三)와 일본 제일의 골동상간의 호가 경쟁이 불붙었다. 마침내 심보가 1만4580원을 호가했다. 경매봉이 ‘탕’ 울렸다. 경성미술구락부 사상 최고의 낙찰가. 31세의 간송이 일본인들의 독무대였던 고미술품 시장에서 대수장가로 공인받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전시
고향 대구의 지인들 몇몇이 최근 상경했다. 서울의 랜드마크가 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간송미술전을 보기 위해서라고. 전시는 28일 막을 내린다. 간송 컬렉션 대표작을 망라한 전시를 놓칠세라 부랴부랴 다녀온 그곳에서 확인한 건 모으는 행위와 보여주는 행위 사이의 거대한 간극이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전시는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봄, 가을 딱 2회, 그것도 2주간의 짧은 전시는 매번 미어터졌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에게 관람 기회를 주기 위해 상업공간으로 첫 외부나들이를 한 터였다.
전시는 원정 관람 열의를 무색케 했다. 회화, 도자기, 전적 등 장르별로 특색 없이 늘어세웠는데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 등으로 나눈 백화점 디스플레이와 다를 바 없었다. 큐레이팅의 부재였다. 그 많은 ‘국보’들은 진열장 속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간송이 일본까지 날아가 현지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로부터 일괄 구입한 고려자기의 하나인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국보 제270호)은 어떤 이야기도, 아우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해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로 재탄생한 공간사옥에서의 개관전은 그런 면에서 대비된다. 건축가 고 김수근의 대표 건축물인 이곳은 아라리오갤러리 김창일 회장으로 주인이 바뀌어 미술관으로 거듭났다. 마크 퀸, 키스 해링, 트레이시 에민, 백남준…. 세계 파워 컬렉터로 꼽히는 김 회장의 고가 컬렉션이 전시되는 때문만은 아니다. 전시 방식이다. 등록문화재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리모델링해 전시 공간으로서 한계가 있음에도 작품들은 곳곳에서 빛났다. 변기와 세면대가 있는 화장실조차 전시공간으로 사용됐다. 비디오 작품에선 때마침 세면 거울을 보는 퍼포먼스 장면이 나왔다. 지난해 가을 독일 베를린 유대박물관 관람 경험은 ‘전시의 힘’을 오롯이 느낀 기회였다. 전시품은 일상의 물건, 가족사진 같은 것들이다. 예술품이 아닌데도 전시 방식이 사람을 울게 만들었다. 히틀러 정권의 박해를 받아 고국을 떠나야 했던 독일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아픔이 전해져 가슴이 먹먹했다.
전시보다는 학술적 연구에 더 목적을 뒀던 간송미술관을 상업적 감각으로 단련된 여타 미술관과 비교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간송이 누군가. 일제 강점기,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불화 등 지금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미술품은 식민지 경제를 주물렀던 일본인들의 차지였다. 그가 전답을 팔아가며 수집하지 않았다면 해외로 팔려나갔을 명품들이 DDP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을 지키듯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간송의 다음 전시를 기대해본다.
손영옥 문화부장 yosohn@kmib.co.kr
[데스크시각-손영옥] 간송전에는 없는 전시의 힘
입력 2014-09-25 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