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사람들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를 열광적으로 환영한 것은 그가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요 12:17∼18)
그래서 그를 죽이려는 자들의 모의는 더 급해지고 있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 12:10∼11)
그때 헬라인 몇이 예수를 찾아왔다(요 12:20). 유대인들 중에는 그가 박해를 피해 헬라로 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요 7:35). 헬라인들이 그를 찾아온 것도 현인을 존중하는 헬라로 가자고 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양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날부터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성경에서 사라진다. 예수께서 헬라인들에게 그들의 피신을 부탁했을 수도 있다. 전승에 의하면 나사로 일가는 헬라를 거쳐 루그두눔, 즉 프랑스의 ‘리용’ 쪽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고발자’를 찾고 있었는데 거기 걸려든 자가 가룟 유다였다.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눅 22:4)
그는 평소에 ‘돈의 분배’로 인간의 평등을 쟁취해야 한다는 이념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에게서 그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요 12:5)
사회학자 루소(1712∼1778)는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서 특이한 견해를 피력했다.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면서 얻은 최초의 지식이었다.”(인간불평등기원론)
인간은 본래 평등하게 태어났으나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에서 불평등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경쟁을 시작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평등’은 투쟁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으로 회복된다.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사 24:1∼2)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그 아들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요 1:14). ‘말씀’은 곧 심판의 기준이 되기도 하지만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래서 아들이 온 것은 심판이 아닌 ‘구원’을 위해서였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
그것을 위해 세상에 와서 사람의 질고를 겪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 맞으려는 ‘아들’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가 마가의 집 다락방에서 진행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그것은 이미 벳새다의 빈 들에서부터 시작된 예표의 성취였다.
“또 잔을 가지사 감사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이것 역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아버지로부터 받은 응답에 대한 감사였다. 자신의 피를 흘림으로 아버지로부터 심판의 권세를 받은 그의 포도주는 요나답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지시를 거부했던 레갑 사람들의 죄를 아들의 권세로 용서해 주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 땅의 진정한 나실인이었던 그가 또 말씀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될 것임을 다짐한 것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사 25:6∼7)
그 연회는 사망을 멸하신 것에 대한 축하연이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매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사 25:8)
예수께서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요 13:4∼5)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그렇게 하면 내가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고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며 본을 보여 가르쳐 준 것이었다(요 14:12). 그러나 그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
제자들이 모두 그가 누구냐며 수군거리고 있을 때 그분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요한이 그분께 물었다.
“주여 누구니이까.”(요 13:25)
그러자 그분은 내가 떡 한 조각을 초에 적셔서 주는 자가 그라고 하시며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인간의 평등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결국 돈으로 자신의 인생을 허물었다.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마 26:15∼16)
예수께서 유다를 바라보며 딱하다는 듯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요 13:27)
유다는 그분이 준 떡 조각을 받고 자리를 떠났다. 어두운 밤이었다.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20)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라
입력 2014-09-26 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