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곽효정] 걸어서 바다까지

입력 2014-09-24 03:23

어느 해 가을, 나는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걸어서 바다까지’라는 미션을 걸고 춘천에서 화진포까지 가는, 과정이 중요한 여행이었다. 하루 걸을 분량을 정하고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힘들면 히치하이킹을 했다. 슈퍼도 없는 시골에 닿으면 아무 집에 들러 ‘물 한 잔 주세요’ 하고 부탁하기도 했다. 첫 번째 집에는 할머니 한 분과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그날은 다섯째가 손주와 함께 온다면서 이른 아침부터 마루에 앉아 기다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사라져가는 우리 뒷모습도 그렇게 오래 바라봐주셨다.

바다로 가는 동안 수해로 피해 입은 ‘인제’에 들렀다. 여전히 복구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나마 일을 도왔다. 산사태로 땅의 모든 것들이 뒤섞인 밭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차를 타고 지나쳤다면 몰랐을 풍경과 사람 그리고 냄새(?)를 마음에 담았다.

음식점이 없는 곳에서는 군대 초소에서 밥을 부탁하기도 했고, 숙박시설이 없는 곳에서는 소방서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다. 또한 군부대에서 똥을 푸는 아저씨, 은퇴하고 시골에 펜션을 만든 아줌마, 직업군인 등의 도움으로 걸어서 가기 힘든 코스를 차로 지날 수 있었다.

하루가 쌓일수록 감사한 사람이 늘었다. 우리는 지도 위에 그들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했다(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지도가 너덜해질 즈음 바다에 도착했다. 태풍이 오고 있었고 우리는 다음날 길을 떠났다. 목적지보다 가야 할 길이 더 소중한 여행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7번 국도 어느 휴게소에서 자판기 커피를 든 아저씨 앞을 지나치는데, 들려오는 말. “어디까지?” 우리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그의 덤프트럭에 안착했다. 그는 일 때문에 지방을 다니면서 다양한 여행자와 마주쳤다고 한다. 한번은 한여름에 자전거를 타고 무전여행 하던 대학생들을 태워줬다가 재워주기까지 했는데, 그 후로 힘들어 보이는 여행자를 지나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지도에 기록한 주소로 당시 근무하던 곳의 잡지를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독자 사연함에 엽서가 도착했다. 7번 국도에서 만난 아저씨의 딸로부터 온 것으로, 아빠에게 우리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잡지책이 와서 놀랐다며 길 위의 사람들을 돕는 아빠가 자랑스럽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길 위의 스침이지만 나는 이따금 그 엽서가 담긴 잡지책을 보며 아저씨와 덤프트럭을 생각한다.

곽효정(매거진 '오늘'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