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흥우] 짝퉁 차이나타운

입력 2014-09-23 03:18
유대인과 더불어 오랜 해외이주 역사에도 불구하고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이 화교다. 동남아시아나 미국, 캐나다, 호주, 유럽의 주요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차이나타운을 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 입구, 패루(牌樓) 안으로 들어서면 중국 아닌 곳에서 ‘작은 중국’을 느끼고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이곳은 항상 관광객들로 붐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런던, 밴쿠버, 몬트리올, 시드니, 페낭, 요코하마 등의 차이나타운이 대표적이다.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기 시작한 건 아편전쟁(1840∼1842) 이후의 일이다. 아편전쟁 패배로 정세가 불안정해진 데다 설상가상 대기근이 덮친 19세기 중후반 중국인의 엑소더스가 절정을 이뤘다. 이때 고향을 떠난 중국인들이 낯선 이국땅에서 서로 의지하기 위해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차이나타운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에선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와 함께 온 상인 40여명이 인천에 정착하면서 화교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883년 48명에 불과하던 화교 수는 이듬해 인천 선린동 일대 5000평에 조계지가 세워지면서 235명으로 5배 가까이 늘었고, 1890년엔 1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 화교는 중계무역으로 인천 상권을 장악했고 193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내리막길을 걷던 한국 화교사회는 정부의 박해로 거의 와해되기에 이른다. 박정희정권의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 조치(1967년)로 헐값에 땅을 빼앗기다시피 했고, 화교들에게만 허용하던 중국음식업계에 한국인 진입을 허용하면서 절반 이상의 화교들이 우리나라를 떠났다. 이후 한동안 우리나라는 차이나타운이 없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됐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찾은 중국인 관광객 요우커(游客)는 433만명, 올해는 5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명동, 이대 앞, 홍대 거리는 중국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요우커로 넘친다.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서울, 인천, 부산, 고양, 강릉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차이나타운 조성·확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차이나타운은 미운 오리새끼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인 외국의 차이나타운과 달리 우리나라 차이나타운은 지자체가 주도해 만든 ‘짝퉁’에 가깝다. 그러니 외국의 차이나타운 같은 역사나 화교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가 없다. 얼마나 많은 요우커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이런 짝퉁을 찾을지 의문이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