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펜싱의 새로운 역사가 쓰인 날이었다. 전희숙(30·서울시청)은 21일 펜싱 여자 플뢰레 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새로운 여제의 탄생을 알렸다. 한국 펜싱의 대들보인 선배의 등만을 쫓으며 달려온 후배가 마침내 그 벽을 넘어 정상에 올랐다. 남자 펜싱 사브르 개인전에서는 구본길(25·국민체육진흥공단)이 금메달 행진을 이어갔다. 두 영웅의 탄생이었다.
여제의 탄생은 일찌감치 예고됐다. 전희숙은 경기도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 펜싱 여자 플뢰레 개인전 준결승에서 한국 펜싱의 간판스타 남현희(33·성남시청)를 물리쳤다. 남현희라는 거대한 산의 그늘에서 벗어난 순간이었다. 이후 이어진 결승전은 전희숙만의 무대였다. 리 후이린(25·중국)을 15대 6으로 누르며 완벽하게 제압했다.
한국 펜싱 선수 전희숙을 이야기하면 항상 따라오는 사람이 한국 여자 펜싱의 대들보 남현희다. 남현희는 전희숙이 선수 생활을 시작할 순간부터 언제나 전희숙보다 빛난 플뢰레의 최강자였다. 전희숙이 쟁쟁한 세계 수준급 선수들을 제치고 국제대회 개인전 정상에 도전하려할 때면 마지막에는 남현희가 버티고 있었다. ‘간판스타’이자 ‘최강자’인 선배와 수차례 경합하면서 전희숙 역시 실력이 ‘환골탈태’한 것도 맞지만 남현희에 비한다면 부족함이 있었다.
그 때문에 전희숙의 수상 경력에서 ‘1위’ 항목은 대체로 단체전이었다. 개인전에서 남현희에게 지고, 단체전에서 남현희와 합심해 한국 여자 펜싱 플뢰레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질 수 없는 대결이었다. 전희숙은 남현희에게 갚아야할 빚이 있었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4강에서 격돌한 두 선수는 남현희가 15대 14로 이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희숙은 동메달을 따는데 그쳤다.
이번에는 달랐다. 기나긴 패배의 역사가 이날 뒤집혔다. 선수생활 12년 동안 한 번도 넘지 못하던 벽을 마침내 극복한 전희숙의 앞에는 처음 목에 걸어보는 메이저 국제대회의 금빛 메달이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검객’으로 딸에게 금메달을 안겨주고자 했던 남현희의 열망보다 숱한 패배를 극복하고 승리하고자 하는 전희숙의 갈망이 더 간절했다.
이어 두 번째 영웅이 탄생했다. 구본길은 펜싱 남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김정환(31·국민체육진흥공단)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에이스다운 모습이었다. 2003년 오성중에 다니던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펜싱의 길로 접어든 구본길은 단기간에 정상급 선수로 성장했다.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는 베이징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중만(중국)을 물리치고 개인전 금메달을 따냈고 이듬해 국제펜싱연맹(FIE) 랭킹을 1위까지 끌어올리며 ‘구본길 시대’을 열었다. 결승전이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그는 “결승에서 한국 선수와 좋은 성적이 나서 기쁘다”며 “남은 단체전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이어 “경기 끝나고 정환 형이 눈에 들어왔다”면서 “왠지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밝혀 김정환에 대한 남다른 우정을 보였다.
이로써 한국은 전날 여자 사브르 금·은메달, 남자 에페 금·은메달에 이어 이날 여자 플뢰레 금·동메달, 남자 사브르 금·은메달을 따내며 펜싱에 걸린 금메달 4개를 독식했다. 고양=임지훈 기자 zeitgeist@kmib.co.kr
왼손잡이 여검사 전희숙, 만년 2인자 설움 씻었다
입력 2014-09-22 0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