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미경 (8) 선행이라도 오른손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입력 2014-09-22 03:45
국회의원 정미경. 검사시절 정시 퇴근은 사치였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많은 분들이 내게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질문을 받고 난 후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초임 검사 시절, 늘 야근에 시달렸다. 새벽에 퇴근했다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이 나였다. 대낮에 출장 갔다가 ‘낮’의 모습이 이랬었구나 하고 속으로 웃은 적도 있었다. 검사가 이런 것이었나 하는 회의가 들 정도였다. 이러다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저녁식사 한 번 못하고 늙어버리겠구나 하는 걱정도 됐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묘안을 짜냈다. 한 달에 두세 번 ‘땡 퇴근’하는 날짜를 정해놓고 그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일찍 퇴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도 일반인의 행복을 누리자며 큰 소리치고 만든 나름대로의 묘안이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묘안은 결국 묘안으로 끝나버렸다.

‘땡 퇴근’ 하기로 정한 그날. 우리 검사실은 신나서 일찍 퇴근 준비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고 기분 좋게 웃음꽃, 이야기꽃을 피웠다. 꼭 그럴 때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터진다더니 글쎄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기소중지되었던 피의자가 긴급 체포되어 우리 검사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짜증이 몰려왔다. 꼭 이럴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왜 하필 도주했던 피의자가 이 순간에 잡혀서 오는 거야. 속으로 투덜투덜댔다.

이럴 때 검사는 48시간 이내에 피의자를 구속할지, 불구속 석방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기록을 검토하면서 피의자신문을 통해 어차피 구속할 사안이라고 판단을 내릴 때는 문제가 없다. 그날 유치장에 구금시킨 후 그 다음 날 조사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불구속수사를 해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때가 문제이다. 5∼6시간 정도 조사하고 난 후 신원보증인을 불러 각서를 받는다. 그러니 피의자를 석방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했을 경우엔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날은 바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그런 경우였다. 우선 우리 계장님이 나에게 눈짓을 보낸다.

“안 돼요. 검사님, 제발 내일 조사하시지요. 오늘 약속 깨면 저는 아이들에게 나쁜 아빠 된다고요.” 여직원도 마찬가지다.

“안 돼요. 검사님. 내일 조사하셔야 해요. 저 시집가야 해요.”

사실상 도주했던 피의자를 유치장에 하룻밤 재우고 그 다음날 조사한다고 해서 법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검사가 그 순간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이 알 수는 더더욱 없다. 또 그 판단이 옳다고 100% 장담도 못한다. 피의자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스스로도 도주했던 사람인지라 체포되어 유치장에 구금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내 등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 피의자가 나라면 어떨까. 오늘 밤 안으로 조사해서 석방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안다면 당연 유치장에서 잠을 자고 싶지는 않겠지.

결국 나는 직원들의 눈초리를 피해가면서, 그 피의자를 5∼6시간 조사한 후 집으로 돌려보냈다. 결과적으로 땡 퇴근이 아니라 땡 자정퇴근이었다. 정작 그 피의자는 본인이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 자기가 석방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아, 이거였구나. 결국 하나님이 아시면 그것으로 된다는 것이구나. 우리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고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도왔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거구나. 그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거였구나. 내가 모르는 가운데 나를 돕는 자가 많으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정리=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