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동길 100년의 이야기, 한장에 담다

입력 2014-09-19 04:42
17일 서울 종로구 계동길 물나무 마당 갤러리에서 열리는 ‘공간잇기, 계동 100년전’에 전시된 일러스트 작가 강혜숙의 ‘계동 100년, 시간을 품은 지도’. 조선시대 역사적인 장소부터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는 장소까지 모두 담겨 있다.
사진작가 김윤관이 백양세탁소 앞 관광객과 상인, 주민을 찍은 '계동을 이어가는 사람들'.
17일 계동 답사에 나선 사람들.
17일 오후 4시 서울 종로구 계동길 물나무 마당 갤러리 앞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간디자이너인 서준원(36·여)씨와 홍익대학교 사진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강다원(32·여)씨가 이들 앞에 섰다.

서씨와 강씨는 각각 10여명의 사람을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이가문화체험원이 나타나자 맞은편 골목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 중턱에서 강씨가 멈춰 섰다. “여러분 뒤를 돌아보세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한옥의 지붕들이 세월을 이고 있는 듯 이마를 맞대고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놓칠 멋진 풍경이었다.

답사는 계속됐다. 강씨가 현대 계동 사옥 뒤편에 있는 칼국수 집을 가리켰다.

“이곳은 여운형 선생의 집터에요. 계동 주민들도 잘 모르지요.”

독립운동가이자 진보적 정치가였던 여운형(1886∼1947) 선생의 집터임을 알려주는 것은 인도에 세워진 작은 표석뿐이었다.

이날 행사는 서씨와 강씨가 함께 기획한 ‘공간 잇기 프로젝트’의 하나로 진행한 계동길 걷기 이벤트다. 두 사람은 지난해 7월 만나 의기투합해 골목길이라는 공간의 의미와 역사, 그리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자는 이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제안은 서씨가 했다.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역사 시간 선생님이 동네 지명을 알려주고 다음 주 발표하라는 숙제를 냈는데 아이들이 도서관 자료부터 할머니 이야기 등 각자 방식으로 조사해 왔어요. 역사적 장소도 아닌 동네에 그렇게 풍부한 이야기가 많다는 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 우리나라 동네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을 그때부터 했어요.”

왜 북촌의 계동길이었을까. 서씨는 “계동이란 행정 명칭이 생긴 게 1914년인데 새 주소 표기명도 계동길이 돼 그 이름은 100년의 역사를 갖게 됐다”면서 “그만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라 이를 담아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1년간 주민들을 만났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다니던 건설회사를 그만 둔 서씨는 퇴직금까지 쏟아 부었다.

“계동에 살지도 않는 우리가 이 일을 하자 주민들이 처음엔 경계를 하더군요. 잡상인 취급을 받을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누구보다 저희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셨어요.”

그런 열성을 쏟은 끝에 ‘계동 100년 지도’가 만들어졌다. 문화재인 조선시대 천문 관측대인 관상감 관천대부터 창덕궁 돌담 옆 빨래터, 1940년에 개원해 현재까지 진료 중인 최소아과 의원, 북촌 최초의 목욕탕인 중앙탕, 현대빌딩까지 시대를 초월한 계동의 대표적인 장소들이 표기됐다.

취지에 공감한 일러스트 작가 강혜숙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토대로 계동 지도를 그렸다. 사진작가 김윤관, 영상작가 조금래는 각각 계동 사람과 계동의 현재 모습을 사진과 영상에 담았다. 모두 재능 기부 형태로 참여했다. 이들의 작품은 이날부터 물나무 마당 갤러리에서 열린 ‘공간잇기, 계동전 100년’전에 걸렸다. 전시는 24일까지 계속된다. 계동길 걷기 이벤트는 20, 21일에도 진행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잡지 ‘유심’ 발행했던 출판사 유심사 터에 자리잡은 만해당이라는 게스트하우스 주인 이유리(45)씨는 “주민인 우리도 하지 못한 걸 것을 젊은 친구들이 한다고 나섰을 때 부끄러웠다”면서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지속시킬 지가 주민들에게 남겨진 숙제 같다”고 말했다.

계동은 어떤곳

계동은 청계천과 종각의 북쪽에 있는 동네라는 뜻의 북촌 마을 중 하나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악과 응봉을 잇는 산줄기 남사면에 위치한 옛 한양의 중심부다. 계동이란 지명은 조선시대 의료기관이던 제생원(濟生院, 계동·가회동·원서동에 걸쳐 있던 마을)에서 유래했다. 음이 변해 계생동(桂生洞)으로 불리던 것이 1914년 동명을 제정할 때 기생동(妓生洞)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생'자를 생략해 지금의 계동이 됐다. 새 도로명 주소 표기명에 따라 현재 계동길이 됐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