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잉글랜드 갈등은 ‘경제보다 종교’

입력 2014-09-19 04:17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기독교는 각각 장로교와 국교회로 양분되면서 역사 속에서 갈등을 겪었다. 사진은 존 낙스 에든버러 교회 전경. 국민일보DB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를 계기로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역사가 재부각 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의 핵심은 경제보다 종교문제로 봐야 한다. 역사적으로 반복된 두 국가간 분쟁처럼 기독교 분파 간 갈등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을 주도하는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장로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사가들에 따르면 17세기 초까지 대영제국은 잉글랜드의 튜더가와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가로 분리돼 있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자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했고 100년이 넘는 치열한 논란 끝에 두 나라는 1707년 완전히 통합했다.

이에 앞서 종교개혁의 물결은 두 나라를 휩쓸었다. 스코틀랜드는 존 낙스가 칼뱅의 장로교를 전파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서인 ‘낙스 전례서’ 등을 통해 스코틀랜드 개혁을 주도했다. 반면 잉글랜드 국교회는 전례와 예배 등을 강조해 자유로운 형태의 예배를 받아들인 스코틀랜드 교회와 달랐다.

이른바 ‘주교전쟁’(1638)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주교제도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하다 발생한 갈등이다. 당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잉글랜드 성공회 요소를 도입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저항에 부딪혔고, 뒤를 이은 찰스 1세도 ‘공동기도서’ 등을 스코틀랜드에 적용했지만 역풍을 맞았다.

이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서약운동이 일어났다. 스코틀랜드 신자들이 자신들의 예배 방식과 신앙을 지키겠다는 서약이었다. 이어 스코틀랜드 하원은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모든 주교를 추방했으며 그 자리에 장로교 성직자를 세웠다. 주교전쟁은 잉글랜드의 찰스 1세가 추방당한 주교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면서 발생했다.

두 나라가 대영제국이 된 이후에도 갈등은 식지 않았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스코틀랜드 교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자 1834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칼뱅주의 그룹인 복음주의파가 자유교회를 설립, 국교회에 ‘물든’ 스코틀랜드 교회와 결별했다.

이후 자유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유력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기금을 마련해 목회자들의 생계를 지원했고 에든버러대 안에 ‘뉴 칼리지’를 설립, 윌리엄 챔버스 등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복고를 외쳤다. 총신대 라은성 교수는 “이들은 존 낙스 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했다”며 “현재 SNP가 내세우는 ‘새로운 스코틀랜드’라는 구호도 개혁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교회는 세계 교회사에서 적잖은 기여를 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 형성을 도왔고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 로버트 모펫, 메리 슬레서 등을 배출했다.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자였던 존 로스 선교사도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산실인 세인트앤드류대와 에든버러대, 에버딘대, 글라스고우대 등도 유명하다.

18일 치러진 스코틀랜드 분리 독립 투표는 교회의 향방과는 관계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급속한 세속화로 두 나라 교회 모두 약하다”며 “지금은 부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기독교인은 132만명(25.7%)으로 50년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