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교회였다. 130년 한국교회의 뿌리, 서울 남대문교회가 그렇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경성역에 내려 눈을 들면 숭례문 방향으로 제중원과 남대문교회가 보였다.
1950년대, 월남 실향민들에게 남대문교회는 약속의 장소였다. 60, 70년대 '무작정 상경'한 이들이 서울역에 내려 고개를 들면 남대문교회가 보였다. 1975년 대흥행작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 속 무작정 상경한 처녀 영자의 눈에도 석조 교회당 첨탑의 십자가가 보였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함께 시대의 역작이었다.
그리고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았다. 산업화시대 영자와 같은 저임 노동력을 바탕으로 압축성장한 대한민국은 영적 부패로 국제금융위기에 내몰렸다. 실업자가 속출했다. 가족공동체가 곳곳에서 해체됐다. 그 무렵 서울역을 중심으로 노숙인이 급증했다. 역 광장에서 배회하던 노숙인들이 눈을 들었다. 교회가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향한 발걸음조차 옮길 수 없었다. 남대문교회가 그들을 찾아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숙인 급식이 시작됐다.
2014년 9월. 여전히 남대문교회 첨탑 십자가가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 빛은 교회 주변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GS역전타워·밀레니엄서울힐튼 빌딩에 가려 예전과 같은 랜드마크가 되어주진 못한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관문 앞에서 우리의 영적 갈증을 채워주는 말씀의 빛이다.
서울역에 내리면 남대문교회가 보인다
21일 오후 2시30분. 남대문교회 대예배당에서는 '알렌 선교사 입국 130주년 기념예배'가 열린다. 앞서 이 교회는 지난 17∼19일 '한국교회사 특강'을 진행했다.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호러스 알렌(1858∼1932)은 1884년 9월 20일 제물포항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21일 자신의 집에서 한국 최초의 공식 주일예배를 올렸다. 남대문교회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의 시작을 알리는 예배였다.
알렌은 입국 한 달여 만에 갑신정변이라는 정치격랑에 직면한다. 이때 김옥균 등 '3일천하' 정국을 이끈 개화파의 무력에 집권세력 실세 민영익이 자상을 입는다. 민영익은 알렌의 도움으로 완치된다. 서양 의술에 놀란 고종은 국립병원 제중원 설립에 박차를 가했고 이를 알렌에게 맡겼다. 당연히 제중원 안에는 예배공동체(교회)가 있었고 이 공동체가 발전되어 남대문교회가 됐다. 1887년 세워진 도성 안의 조직교회 정동·새문안교회와는 그 궤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당시 조선 선교는 교회 박해를 피하기 위해 병원·학교를 세워가며 복음을 전파했다. 알렌 부부의 제중원은 선교센터 역할을 했다. 제중원이 서울 재동, 동현(지금의 을지로2가)을 거쳐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 남대문로5가 연세재단세브란스빌딩)에 정착하면서 교회·병원·학교라는 선교의 세 축을 본격화한다. 그 발전된 형태가 오늘날 남대문교회, 세브란스병원, 연세대다.
5대 신앙家 김 장로와 며느리의 미소
지난 14일 주일 오후. 남대문교회 손윤탁(59) 담임목사와 송용철(83) 은퇴장로, 김충현(69) 시무장로 등과 함께 남대문교회 '역사 투어'를 했다. 송 장로는 "대한민국 관문 서울역 앞에서 못자리 교회 역할을 한 우리 남대문교회"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교회 안 역사박물관 전시실에서 그는 감회가 남다른지 가슴 벅차하며 묵상을 했다. 김 장로는 5대째 이 교회를 섬긴다. 이날도 며느리 이지영(33·성악가)씨가 2층 본당 계단을 오르다 시아버지를 만나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
제중원 예배공동체 남대문교회는 서울성곽 밖(그림지도)에 자리 잡았다. 지금의 세브란스빌딩을 중심으로 넓게 자리 잡았다. 퇴계로길은 제중원 땅이었다.
"동현터(현 한국외환은행 본점)만 하더라도 도성 안입니다. 한데 당시 현대식 종합병원 제중원을 남문 밖에 건립하면서 남대문교회도 이전해야 했어요. 많은 교인이 도성 밖으로 나가길 꺼렸어요. 그래서 승동교회 등 사대문 안 교회로 흩어졌죠. 소수만이 남대문교회로 따라 나왔어요."
손 목사의 이 같은 지문에는 '세상 속 교회', 즉 낮은 자를 향해 읍성 밖 사람들에게 손 내밀었던 남대문교회 정신이 숨어 있다. 사대문 안과 밖을 구별하는 성곽은 '복음 이전과 복음 이후'라는 경계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남대문교회와 교인은 신분과 권위를 버리고 과감히 성령의 사역을 따랐다. 사도 바울과 같이 세상 속을 향해 뛰어든 것이다.
그리하여 서상륜 함태영 최용호 박정찬 이재형 김익두 김치선 등 신앙의 거목들이 교회를 이끌었다. 그들은 민족교회 지도자로서 시대의 예언자가 됐다. 성문 밖에서 문고리를 두들기는 예수의 심정으로 구령, 독립, 구제, 순교, 전도를 실천했다. 3·1운동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갑성, 민족운동가 남궁혁, 초대 보건후생부 장관 이용설,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성자 맹의순 등의 인물도 그들의 바울 신앙에서 나왔다.
6·25전쟁으로 남대문교회는 불탔다. 그리고 현재 자리에 1955년 고딕 양식 석조 건축이 시작됐고 14년 만에 준공됐다. 흰저고리에 검정치마 입은 여전도회 집사들이 망태기로 자재를 날라 세운 교회다. "성전 지으면서 빚지면 안 된다"는 배명준 목사의 뜻을 장로와 교인 등이 호응했다. 그래서 14년이 걸렸다. 요즘 한국교회가 새길 대목이다.
그런 랜드마크 석조 교회당은 이북 실향민들에게 "서울역 앞 남대문교회에서 만나자"라는 관용구를 낳았다. 그만큼 교회는 세상과 함께하며 역사의 고비를 지켜봤다는 얘기다.
디아스포라를 향해 내미는 손길
남대문교회 주변에는 마을이 없다. 도심 공동화에 따라 교회만 남았다. 그런데도 주일마다 1500여명이 출석한다. 송·김 장로의 증언.
"1970년대 강남 개발이 한창일 때 이전 문제가 거론됐어요. 처음엔 이전으로 중심추가 쏠리기도 했죠. 그러나 교회 정신이 훼손된다는 걸 스스로들 느꼈습니다. 80년대엔 한 재벌이 강남 이전을 권했고요. 그런데도 남문 밖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선언한 목회자들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열악할수록 소금은 제 맛을 냅니다. 교회는 소금입니다."
교회는 IMF사태 직후 서울역 등의 노숙인들에게 하루 4000∼5000인분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당연히 교회가 할 일이었다. 하지만 관내 기관장 등이 찾아와 "도시 미관에도 문제가 있는데 왜 교회가 이런 일을 합니까"하고 말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강남 이전을 접은 남대문교회 정신을 보여준 사례다.
알렌 입국 130년인 오늘. 상처 받은 영혼 '영자'가 섰던 서울역광장. 상심한 이들이 지금도 서울역광장에서 서성인다. 그들이 눈을 들면 알렌의 남대문교회가 있다.
"한국교회 구원의 등대 역할할 것"
남대문교회 손윤탁 목사의 비전
"남대문교회는 개교회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를 품고 가는 역사 교회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국 초대교회 신앙의 전통과 기본을 적어도 우리는 보여주어야 합니다."
손윤탁 목사는 신앙의 본질을 강조했다. 남대문교회가 한국교회 시작부터 선교와 복음의 중심이었으니 구원의 등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14일 주일설교 '이스라엘 역사와 세겜 언약'을 통해 "유대인 교과서 첫 장에 '과거 우리는 애굽의 종이었다'라고 말하는 교육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며 "과거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오늘의 우리를 반성하고 지금부터라도 교회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렌입국 130주년 기념행사'와 24일 서울역광장 노숙인 중식 봉사는 이런 설교와 맞닿아 있다.
남대문교회 예배는 경건이 강조된다. 손 목사는 '셀'이니 '컨퍼런스'니 하는 한국교회 트렌드는 예배 본질과 무관하다고 보았다. 그는 예배, 교육, 봉사, 선교의 정통성을 고수하고자 하는 한국 장자교회 목회자였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한국의 성읍교회-서울 남대문교회] 스스로 낮추고, 길 잃은 자에게 길이 되다
입력 2014-09-20 0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