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그 제자들의 일행이 여리고에서 일찍 떠났다면 저녁 늦게 베다니 마을에 도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에서는 부지런히 환영 만찬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환영 만찬이라면 당연히 평소에 그들이 유숙했던 곳,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집이어야 했다. 그러나 마가는 뜻밖의 장소를 기록해 놓아서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3∼4) 어째서 나사로의 집이 아닌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환영 만찬이 열렸는지 성경은 설명하고 있지 않다.
갈릴리 출신인 예수의 열두 제자들이 아직도 나사로를 경계하고 있었던 것인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예수를 대접하고 싶다고 간청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한 것은 베드로가 불러 주었을 마가복음이 이 만찬 시기를 분명치 않게 기록한 것이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막 14:1∼2)
그리고 이 기사 다음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열린 만찬의 기사가 어물쩍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성품이 치밀한 마태까지도 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마 26:2) 기사 다음에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마 26:6)가 나오고 있다. 누가는 아예 이 기사를 빼버렸다. 그러나 후일에 요한이 이것을 바로잡았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요 12:1∼3)
베드로는 마가에게 예수의 행적을 불러 줄 때 나사로의 이야기를 송두리째 빼버렸다. 그리고 베다니의 환영 잔치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열리게 된 것에도 석연치 않은 사연이 있어 빼 놓으려 했다. 그러나 ‘향유’ 사건은 예수의 ‘장례를 준비’(막 14:8)한 것이었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 일도 ‘기억하리라’(마 14:9)고 하셨으므로 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적당히 넣어 놓았는데, 마태 역시 베드로의 의중을 짐작하고 그에 따른 것이다. 어쨌든 잔치는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유월절 엿새 전’에 열렸고, 다음 날 그분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막 11:1∼2)
마태는 스가랴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스가랴는 BC 520년쯤에 활동한 선지자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아담의 아들 가인은 권위에 대한 집착과 아우에 대한 시기 때문에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다. 그 후로 사람들 사이에는 집단적 싸움이 상습화되었고,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탐욕 때문에 전쟁을 벌여도, 하나님은 그분의 섭리 안에서 전쟁의 승패를 정하신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전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부르기도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사 14:24)
그리고 때로는 나라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한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사 10:5)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평강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6)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칼과 창으로 제압하는 왕이 아니라 ‘평강의 왕(사 9:6)’으로 오신다. 권세와 폭력으로 위협하고 압제하는 장자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는 맏아들로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군대의 장수는 말을 타지만 평강의 왕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그것도 겸손하여서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신다. 나사로를 살린 예수의 도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귀 주인은 나귀를 가져가는 것에 기꺼이 동의했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 11:7∼9)
환영 인파는 점점 많아졌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7∼38)
그 함성들이 예수께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결정하고 비장하고 결연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아들을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무리들 중에 있던 바리새인들이 민망하여 예수께 말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예수께서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그분의 모친과 동생들은 일행 중에 없었다. 초막절 이후 갈릴리에 있던 가족들은 그분이 큰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유월절 절기도 지킬 겸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환영 인파 속에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성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
그의 눈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아리엘’이 되는 ‘예루살렘’에 장차 닥칠 일들이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 19:43∼44)
글=김성일 소설가, 사진 제공=이원희 목사
[예표와 성취의 땅, 이스라엘] (19)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입력 2014-09-19 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