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고산면 창포마을에 와 보셨나요? 만경강 첫 자락이자 대둔산 발치에 있는 한적한 마을입니다. 관광지도 아니고 특산품도 없던 이곳이 최근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백발의 '다듬이연주단' 때문이죠. 1기 단원들의 평균 나이 78세, 60년 이상 다듬이질을 해온 시골 할매들이 주인공입니다. 8년 전 8명의 할머니들로 시작된 이 연주단은 웬만한 연예인 뺨칠 정도의 경력을 자랑하고 있죠. 그동안 공연 횟수만 100여 차례. 방송 출연은 물론 각종 축제의 단골 초청 인사가 돼 '신토불이 난타'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열정과 활력을 본다면 ‘난타’의 기획자인 송승환씨도 놀랄 것입니다. 사라져가는 전통을 되살리고, 산골에 활기를 불어넣고, 노년의 건강까지 유지해 가는 비결. 산골 할매들의 나이를 잊은 도전과 흥겨운 방망이 소리 한번 들어보실래요?
연습 아닌 세월속에서 나오는 소리
“또닥또닥 또그닥또그닥….”
지난달 29일 젊은 남녀 20여명이 창포마을에서 할머니들의 공연을 구경했습니다. 이들은 서울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온 예비창업자들로 직접 방망이로 두드려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이들은 청랑한 소리에 신기해하면서도 “(다듬이질이) 쉽지만은 않다”고 털어놨습니다.
창포마을다듬이연주단은 2006년 6월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농림부가 이 마을을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선정했지요. 이를 계기로 전국 최대 창포 군락지(1만3000여㎡)인 마을을 알리고 옛 소리를 보존하기 위해 다듬이 경력 50년이 넘는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드림팀’이 꾸려졌습니다.
처음엔 “뭐 이런 걸 하느냐”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모여 연습을 하다 보니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하나 된 소리가 만들어진다고 하네요. 김정순(83) 할머니는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말합니다.
연주시간은 보통 10∼15분. 특별한 운율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연습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닙니다. 처녀 적부터 해온 다듬이질이 40∼70년, 삶과 세월에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소리죠.
끊어질 듯 이어지다 솟구치는 다듬이질 소리에 박수와 환호가 쏟아집니다. 새색시 같은 얼굴에 예쁜 한복을 입은 할머니들은 미소로 답합니다.
“모여서 웃고 두드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평생 농사일만 했는데…. TV에도 여러 차례 나오고, 도지사랑 군수, 강호동이도 만나봤으니 남부럽지 않죠.”
단원들은 다듬이 덕분에 색다르고 즐거운 삶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지난 8년간 단원 가운데 크게 아픈 사람 하나 없었다니 할매들 말씀처럼 신기하죠?
그 사이 할머니들은 전국적인 스타가 됐습니다. 방송 4사의 프로그램에 두루 출연하고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에서도 공연했지요. 3년 전 완주군으로부터 ‘군민의 장’을 받은 것은 보너스였습니다.
2012년엔 ‘젊은피’ 2기생 10명을 충원했습니다. 후계자 양성 차원이었습니다. 다듬이는 2명씩 짝이 되어 4개조가 함께 두드립니다. 큰 무대엔 18명이 모두 나서죠.
임동창 선생과 함께한 ‘완주아리랑’ 감동
연주단의 김달례 단장은 단원 가운데 최고령입니다. 하지만 8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녀 같은 미소가 정말 멋졌습니다.
이 마을 토박이인 할머니는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재담이면 재담,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동료들은 이런 그를 다듬이연주단의 ‘꽃’이자 ‘방망이’ 같은 존재라고 말한답니다. 김 단장이 불러주는 ‘청춘가’를 들어보니 어느 소리꾼의 노래보다 더 구성지네요.
김 단장은 ‘스타킹’ ‘언제나 청춘’ 등 방송에 여러 차례 나가봤지만 지난해 4월 음악극 ‘완주아리랑’ 공연을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정말 재밌는 시간이었어요. 모두 임동창 선생님 덕분이죠. 당일엔 분장에만 1시간이나 걸렸어요. 얼마나 웃었던지….”
김 단장은 곱게 단장하고 빨래 빨고 놋그릇 닦고, 맷돌 돌리는 모습도 연기를 했습니다. 물론 신나게 다듬이도 두드렸죠.
단원들 모두 이때의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 공연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씨의 제안과 기획으로 이뤄졌습니다.
이를 위해 할매들은 난생 처음 ‘오디션’도 봤습니다. 단원은 100% 주민들로 구성돼 1년간 땀을 흘렸습니다. 총연출을 맡은 임씨는 다듬이질을 통해 고된 삶의 희로애락이 정화되고 마침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는 옛 여인들의 삶을 극에 담았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 이런 후기들이 떴습니다. “아무리 임동창 선생님이지만 할머니들 음악극이라기에 처음엔 별 기대 없이 갔는데, 그런 감동이 올 줄은 몰랐어요. 정말 강력 추천합니다!!”
당시 임씨는 “다듬이를 연주하는 할머니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왔다”며 “다듬이 공연이 전통자원을 활용한 특화된 문화 콘텐츠로서 새로운 문화의 흐름으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전했습니다.
‘마을 홍보대사’ 방문객에 다듬이 교육
할매들은 마을의 홍보대사입니다. 평소엔 체험마을 방문객들에게 다듬이 교육을 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마침 한가위가 지나자 연주단을 부르는 손길이 많아졌답니다.
17일 고산자연휴양림 공연에 이어 25일 전북도청, 28일 비봉 천호성지에서 잇따라 공연할 예정입니다. 또 22일엔 서울의 한 초등학교 학생 80여명이 마을을 찾아온다고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은 눈과 귀를 쫑긋 세우는 학생들을 보면 아픈 곳도 금세 잊고 만다고 말합니다.
“요즘은 듣기 어려운 소리를 알리고 마을까지 홍보하니 뿌듯하죠. 젊고 어린 친구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큰 즐거움이고….”
순둥이인 김순례(77) 할머니는 “옛날에 살아온 거 생각하믄 징그랍당게. 근데 지금은 다듬이 허먼서 기분 째지게 좋아”라며 구수한 사투리를 들려줍니다. 2기생인 이숙자(66)씨는 “처음엔 어색했지만 재밌게 배우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며 “더불어 선배님들의 건강도 닮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할매들의 꿈은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과 해외공연. 이를 위해 다른 동작을 추가하는 등 연주법에 변화를 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 탓에 아직은 버겁습니다. 김 단장은 “젊은 단원을 더 뽑아서 ‘젊은이 방식’으로 더 다양하게 연주하고 공연하면 좋겠다”고 덧붙입니다.
뒷바라지를 하는 창포마을 전윤희(34·여) 연구원은 “할머니들이 ‘내일은 또 어디를 가고 뭘 하게 될랑가, 그런 거 생각하면 신나고 좋고 글제’라고 말씀하곤 하신다”고 일러줍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창포마을. 가을 들녘을 지나오면서 전 연구원의 소망대로 할매들이 정겨운 소리를 전국에 전하며 모두 건강하게 지내시길 함께 기원합니다.
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
[슬로 뉴스] 할매들 ‘다듬이 소리’ 삶의 주름을 펴다
입력 2014-09-18 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