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9월 10일 오후 2시. 캐나다 선교사 로버트 그리어슨(1868∼1965)은 한양 ‘음악원(Academy of Music)’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하고 일기를 남겼다.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가 고종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모임을 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하여 성사된 예배였다. 그 기록은 로버트 그리어슨이 태평양을 건너 일본과 제물포항을 거쳐 서울에 내린 지 나흘 째 되던 날 쓴 것이다. 이날 그리어슨은 이렇게 묘사했다.
‘500∼600명 정도가 모였다. 유럽 여성으로 유일하게 참석한 레나(아내)는 칸막이로 나눠진 곳에서 조선 여성들과 함께 있었다.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이 선포됐다. 몇몇 조선인은 유창하고 우아한 말투로 연설했다. 특히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정부에서 중요한 직위를 맡고 있는 젊은 양반 윤치호(1865∼1945)씨가 특히 청중으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진리가 없기 때문에 조선이 부패했다고 말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부패했다고 역설했다…집회가 끝나고 언더우드 박사 댁으로 돌아가는데 박사님과 레나는 일꾼이 든 가마를 탔다.’
책은 로버트 그리어슨이 남긴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딸 도리스 그리어슨이 저술한 것이다. 도리스는 1931년 함경도 성진에서 태어났으며 한국 이름은 구복순이다.
로버트 그리어슨은 1893년 조선에 파송된 캐나다 첫 선교사 맥켄지의 후임으로 이 땅에 왔다. 열병으로 병사한 맥켄지의 조선 파송 예배를 주도했던 의사출신 목사가 그리어슨이었다.
당시 조선은 망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윤치호가 집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부패 때문이었다. 앞서 1884년 갑신정변이 나던 해 개신교가 전래됐다. 그 10년 뒤 백성은 동학혁명으로 권력의 가렴주구와 외세에 대항했으나 ‘수탈과 탄압’을 이기지 못했다. 지식인들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저항했으나 조정은 그리어슨이 입국하던 해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했다.
그리어슨에 대해 역자는 “조선인에 의한 주체적인 교회 형성과 신앙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라며 “일제 박해에 고난 받는 조선인을 누구보다 사랑했으며 또한 함경도 성진을 중심으로 멀리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구령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19세기 말, 내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사관을 떨쳐내지 못한 보수 성향의 근본주의적 신앙관으로 무장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리어슨을 비롯한 캐나다 선교사들은 피선교지의 교회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복음 안에서 받아들여 그들만의 자주적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동휘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선교사들이 지켜내는 대목은 순교를 각오한 헌신이었다. 그리어슨은 ‘조선의 독립만이 선교의 궁극 목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사실 조선은 1910년 일본의 ‘포로’가 되는 상황에 접어들었다. 또한 누구도 하나님에 의한 해방(1945년)을 예상치 못했다. 때문에 윤치호 같은 인물은 신앙을 뼈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인생 말년에 친일파가 되고 말았다. 그리어슨은 바로 이 같은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우리는 천국에 대해서, 그리고 그 행복한 곳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 읽어주고 설명하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현현되는 천국을 원했으나 ‘때가 차지’ 않은 것도 모르고 크리스천들마저도 훼절하던 시기였다.
한편 그리어슨은 매우 꼼꼼한 사람이었다. 1898∼1901년 일기 기록을 살피면 그가 직접 실측한 황해도 소래교회 평면도, 중정이 있는 한국 여인숙 평면도, 성진 병원 근처 자신의 집터 넓이 계산 그림, 원산만 지도 작성 등 근대 사료가 될 만한 것들을 담았다. 전도를 위해 조선어를 공부하는 방법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수학과 지리,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이 4년간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어슨은 직접 세운 성진병원에서 25년간을 사역, 서양식 의료기술의 기초를 잡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1934년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 책은 서양식 도량형과 서구인 관점의 지명 등을 이해하기 쉽게 주석 등을 달아 펴낸 번역자의 손길 또한 가치를 더해준다.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조선인에 의한 주체적 교회 형성 위해 헌신
입력 2014-09-17 07:24 수정 2014-09-17 0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