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좌절된 ‘열정에게 기회를’… 우린 왜 패자부활에 인색한가

입력 2014-09-17 03:50 수정 2014-09-17 14:59
출범 3년 만에 전격 해체가 결정된 독립야구팀 고양 원더스 선수들이 16일 묵묵히 훈련을 하고 있다. 곽경근 선임기자
타격 훈련 중 대화를 나누는 선수들의 모습. 김동우 기자
프로야구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의 투수 김재현(26) 선수는 지난 13일 이력서를 썼다. 단장으로부터 구단 해체를 통보 받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17년간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야구만 생각했다. 이젠 그 생활과 결별하고 일반 기업 사무직에 지원하기로 했다. "다른 일도 잘할 수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막막해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전직'을 허락받았다. 김 선수는 그동안 중간계투로 활약하며 외국인 용병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그는 16일 "끝까지 프로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17년간 야구만 했다. 시원섭섭하지만 후회는 없다"고 야구를 접은 소회를 밝혔다.

다른 프로야구단과 달리 대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 국내 유일의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가 창단 3년 만인 지난 11일 해체를 발표했다. 원더스는 프로야구단으로부터 방출됐거나, 프로선수가 되고 싶어 문을 두드렸던 선수들의 요람이었다. 2012년 9월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찾아 등번호 1번을 받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모범적인 재기의 장으로 꼽혔다. 박 대통령은 당시 “일자리를 잃어 좌절하는 국민들에게 이 구단이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고양 원더스의 해체 소식은 야구계를 넘어 사회적인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충격이 큰 것은 선수들이었다. 프로구단에서 한 번 버림받은 데 이어 희망을 담금질하던 마지막 보루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리도 패자부활에 인색할까. ‘한국사회에 두 번째 기회란 없다’는 통설이 고양 원더스의 해체로 다시 증명됐다는 자조마저 나온다.

지난 12일 경기도 고양 국가대표야구훈련장. 오전 9시부터 훈련에 나선 선수들로 그라운드는 분주했다. 구단 소속 33명의 선수들 중 김 선수를 포함한 8명은 구단의 해체 발표 직후 퇴단 의사를 밝혔다. 4명은 군 입대를 결정했고, 나이가 어린 20대 초반 선수 3명은 대학 진학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라운드에는 이들을 제외한 25명이 나와 훈련 중이었다. 고양 원더스는 아직 야구 시즌이 진행 중인 점을 감안해 오는 11월까지는 훈련 환경을 제공키로 했다.

검은색 ‘Wonders’ 로고가 새겨진 흰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은 해체 발표를 의식한 듯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수비에 임했다. 오전 11시 외야 펑고 훈련까지 끝난 뒤 김치찌개와 소시지 등으로 식사를 했다.

오후 훈련에선 배팅 머신을 이용한 타격 훈련이 이어졌다. 주전 유격수 김선민(24) 선수는 수백개의 공을 외야로 날려 보내며 훈련에 매진했다. 그는 2010년 신고선수(계약금 없이 입단한 선수)로 프로야구팀 삼성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이듬해 9월 구단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 군대를 다녀온 후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다. 그는 “해체 통보를 받는 순간 택시기사로 일하며 뒷바라지해준 아버지가 생각났다. 올해 프로팀의 부름을 받지 못해 내년을 기약하려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타율 2할8푼4리, 도루 11개. 어쩌면 그의 이력서에 남을 마지막 성적표다.

또 다른 유격수 정유철(26) 선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공원에서 야구를 하다 직업선수가 됐다. 비 오는 공원에서 알루미늄 배트에 공이 맞아나가는 소리가 너무 좋아서 야구를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 시절 슬라이딩을 하다 왼쪽 어깨를 다치면서부터 실력이 정체됐다. 중간에 야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입대기간 내내 떠오르던 야구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군 제대 후 지난해 10월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다. 정 선수는 “올해 팔꿈치 부상을 입는 바람에 내년을 기약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년이 이제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다. 그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러면 된다”며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이 생길 수도 있다. 아직은 포기하기 이르다”고 말했다.

고양 원더스 하송 단장은 “야구계의 취업률이 15%도 안 된다.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한 이들은 패자가 아니라 단지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고양 원더스는 실업팀 하나 없는 한국 야구계에 대리운전이나 택배기사 등 야구와 무관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구단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고양 원더스 출신 선수들이 하나둘 프로팀에 스카우트될 때면 이들의 성공스토리와 헌신, 열정이 다각도로 조명 받았다. 고양 원더스는 2012년 LG에 입단한 이희성 선수를 시작으로 총 23명의 선수를 한국야구위원회(KBO) 소속 프로구단으로 이적시켰다. 그러나 이들 ‘외인구단’의 성공 행진은 이제 종착역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양 원더스는 자금난과 KBO와의 갈등 등으로 해체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대 교육학과 김동일 교수는 “우리는 학생 시절부터 내신과 수능 등을 거치며 ‘이번에 망하면 끝난다’라는 말을 듣고 자란다”며 “각박해진 사회에서 고양 원더스는 소중한 기회를 나누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울림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고양 원더스의 해체를 계기로 사회적 기회를 균등하게 나누고 재기를 돕는 시스템을 구체화하는 사회적 논의가 시작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양=김동우 기자 lov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