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속 세상] 시끌벅적 삶의 캔버스로… 쇠락하던 장터의 변신

입력 2014-09-17 03:32 수정 2014-09-17 16:42
"아따.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시민군 몰려 오대끼(오는 것처럼) 시장통에 사람들이 겁나 많소!"

광주광역시 대인예술시장 건어물상 최보순(66)씨는 지난 6일 모처럼 들썩거리는 시장 분위기에 연신 싱글벙글 이다.

시장에 부는 새로운 활기의 배경엔 이곳만의 예술축제가 있다. 야(夜)시장 예술축제인 '별장'은 이미 시장의 대표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매월 둘째 주 금·토요일 저녁에 펼쳐지는 '별장'은 상주예술가를 중심으로 입주상인과 시민판매상 등이 함께 만들어가는 시장 속 축제다. 젊은이들에겐 색다른 밤 문화를, 중장년층에겐 재래장터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지난 8월에 열렸던 야시장에는 1만여 명 이상이 시민과 관광객이 몰려들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소통하며 서로 스며든다

이곳 시장 역시 다른 재래시장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투와 대형마트 중심의 소비구조 속에 활력을 잃고 침체를 거듭했다.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가던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8년. 재래시장에 손님들의 발길이 줄고 빈 점포가 하나둘씩 늘어나자 지역의 예술가들이 자연스럽게 빈 공간에 찾아 들었다. 시장 상인회에서는 이들을 위해 저렴한 임대료 또는 무상으로 터전을 마련해줬다.

하지만 하루하루의 삶이 곧 전쟁인 상인들과 늘 새로운 작품에 대한 번뇌에 시달리는 작가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사는 일이 처음부터 그리 녹녹치만은 않았다. 한 공간에서 같이 호흡하는 시간이 쌓이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상인과 예술인 집단은 서서히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때마침 문화체육관광부가 대인시장을 롤모델로 전통시장을 지역문화공간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별의별 별시장(1차)'과 '문전성시(2차)' 사업을 진행하며 '시장과 예술'의 상생작업을 추진했다.

작가들은 시장을 찾은 손님들에게 작업실을 공개했다. 상인들을 위해선 가게 입구에 걸 초상화를 그려줬다. 메뉴판을 새롭게 디자인 해주고 평생을 노상에서 생선을 팔아온 할머니를 위해 눈비를 피할 수 있는 싱싱한 생선 그림 디자인의 안락한 판매대를 만들어냈다. 우중충했던 빈 점포의 철문과 담벼락을 캔버스 삼아 산뜻하고 창의적인 그림들이 덧입혀졌다. 광주시에서 지원하는 대인예술시장 별장프로젝트 사업단은 입주 작가들을 위해 언제든 작품 발표를 할 수 있는 미니화랑도 마련했다. 시장이라는 큰 팔레트에 전혀 섞일 것 같지 않은 서로 다른 색채가 만나면서 조화로운 색의 하모니를 이뤄가고 있다.

예술 입은 전통시장들

재래시장의 새로운 활기는 다른 지역 곳곳에서도 목격된다.

서울 중앙시장 한 복판 지하상가엔 서울문화재단 산하 '신당창작아케이드'가 자리 잡고 있다. 요즘 이곳도 예술가 창작 지원과 재래시장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분주하다. 이곳 아케이드 역시 전통시장을 찾는 손님이 줄고 빈 점포가 늘자 서울시가 이곳을 정비해 젊은 작가들을 위한 창작공간으로 꾸몄다.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섬유·도자·종이·금속·사진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가 67팀이 횟집과 이불집, 미용실 등 기존 상점들과 나란히 얼굴을 맞대고 삶의 터전을 이루어가고 있다. 2009년 새롭게 둥지를 튼 예술가들은 상인들과 함께 시장축제도 열고 노래·체조교실과 문화체험 등을 통해 소통하면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중이다.

패기 넘치고 감각이 뛰어난 청년 장사꾼들을 끌어들여 시장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는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 역시 성공적인 사례다. 국회의원 비서, 대기업 사원, 음악가 출신의 다재다능한 젊은 사장들이 재래시장에 수혈되자, 자연스럽게 젊은 손님들이 북적이면서 전주한옥마을과 더불어 필수 관광코스로 자리 잡았다.

시장으로서의 명맥이 거의 끊긴 서울 연남동의 동진시장을 부활시킨 것 역시 예술가들과 문화기획가들이었다.

어려울수록 공존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재래시장이 예술과 젊음을 품으며 활성화되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난제도 적지 않다. 한때 시장 활성화로 사람들의 발길이 북적이던 대구 방천시장의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의 지원프로젝트가 종료되고 상인들이 폭등한 임대료를 감당치 못해 가게 문을 닫으면서 다시 쇠락을 길을 걷고 있다. 김진호 신당창작아케이드 매니저는 "일부 점포주들이 눈앞의 이익 때문에 영세 상인이나 예술가들을 삶의 터전에서 내몰면 안 된다"면서 "새롭고 특색 있는 지역명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입주 예술가들도 상인들과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 사이의 정이 넘치는 재래시장에 예술의 숨결과 젊음의 활기가 깃들게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공존의 지혜가 필요하다.

글·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kkkwak@kmib.co.kr